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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1월 25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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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이은상·권환, 모두 살아나야 한다!- 김인혁(시인)

  • 기사입력 : 2018-11-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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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적 근본주의자·정치적 메시아주의자는 그 자신을 공동체의 심판자로 착각한다. 진보와 보수 어느 쪽 시각을 갖든 배타성과 배제의 논리가 진영의 칼이 된다. 칼 포퍼(Karl Popper)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에서 반증(反證) 가능성을 수용하는 태도를 가질 때 열린 사회로 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비판적 합리주의다. 이는 그래서 중요하다. 문학자원은 지역정체성 형성에 풍성한 토양을 제공한다. 지금까지 지역공동체가 마산의 정체성 발양(發揚)을 위해 어떻게 해 왔는지, 특히 문학자원을 둘러싸고 비판적 합리주의의 가치 위에서 제대로 작동해 왔는지 의문스럽다.

    문학적 권위는 진영의 논리로만 서는 것이 아니다. 문학적 주체로서의 개인이 공동체 내에서 한 행위들은 그의 문학적 업적과 함께 권위의 원천이 된다. 가치인식의 차이 때문에 특정 개인의 문학적 권위에 대해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다만 논쟁이 진영의 논리로 권위가 포장되거나 억압된다면 정의로운 문학적 생태계가 아니라는 논지의 글을 지난번 글(2018.10.5. ‘작가칼럼’)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마산의 많은 문학적 발자취가 생기를 잃고 있다. 많은 문화적 자산과 문학적 자원을 갖고서도 시민들에게 자긍심 하나 채워주지 못하는 게 마산의 현실이다. 그래서인가? 현재 마산의 문화적 정체성 또한 뚜렷하지 않다.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나? 이와 관련해 다음 두 사람의 문인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은상과 권환이다. 문학사에서 이념적인 대척점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공통분모는 마산지역이 배출한 걸출한 문학적 발자취를 남겼다는 점이다. 그래서 두 분 모두 살아나야 한다! 생전의 시시비비는 공정하게 논의하자. 정의의 원칙 위에서 논의된 공과(功過)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될 일이다. 문학적 업적은 기리고, 허물은 후세의 교훈이 되도록 한다면 오늘을 사는 이 지역시민의 지혜가 아닐까.

    권환의 시와 소설은 일제의 강압적 수탈에 맞선 계급투쟁으로서의 카프문학이었다. 시대가 달라진 지금, 그의 계급주의 문학노선이 4차 산업혁명시대의 한국인의 시민적 삶에 문제거리가 될 일이 무어 있겠는가. 그의 계급노선을 오늘의 좌우 진영논리로 재포장하려 한다면 그의 정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많은 카프(KAPF) 문학인이 월북했음에도 그는 고향에 남았다. 진전면 오서리가 인공(人共) 치하에 놓여 있을 때 그는 마산 완월동으로 피란했다. 월북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비록 사회주의 계급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문학세계였지만, 시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던 우리 지역의 한 갈래 정신적 표상(表象)으로 기리면 안 될까.

    노산 이은상의 친일 문제와 관련해 뚜렷이 드러난 것은 없다. 필자가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에 간접적으로 관계하며 입수한 자료집에 따르면, 친일인사 명단 그 어느 자료집에도 들어 있지 않다. 다만, 정부 수립 이후 친권력적 성향을 두고 문제가 제기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육당과 춘원이 일제에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민족을 저버렸을 때, 노산은 우리말을 지키려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다 옥고를 치렀고 광복도 철창에서 맞이했다.

    노산 없이는 마산의 ‘가고파’도 없다. 과(過)가 그의 공(功)을 덮을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합리주의적 비판과 분별이 있어야 한다. 다음 번 칼럼에서 노산과 권환의 문학정신이 지역 정체성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김인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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