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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1월 25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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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탈권위주의의 예술성- 김인혁(시인)

  • 기사입력 : 2018-10-0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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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의 화원(花園)이었다. 지리산 천왕봉 바위 사이에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흐드러져 자욱한 안갯속에서 비바람에 젖은 산객(山客)을 맞이해 주었다. 이번 추석 직전 성삼재에서 세석을 거쳐 대원사로 종주산행을 하며 천왕봉에 홀로 서 있어 본 것도 경이로웠다. 천상의 화원이 주는 감동은 지상세계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경험이었다. 지리산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이 지닌 권위를 내 몸에 그대로 전해주었다. 본질을 담아내고 있는 권위야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권위의 수용은 정의(正義)로 가는 길목이다. 정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삶의 가치 기반 위에 성립한다. 그러한 삶의 가치실현을 위해서는 자유롭고 평등하기 위한 기회의 공정성과 투명성, 그리고 정보의 공유가 전제돼야 한다. 문학적 삶과 그 공동체적 성격에서도 이러한 논리의 적용은 동일하다. 진정한 문학적 권위는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구현하는 문학적 삶에서 탄생한다. 문학적 삶에서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문학적 주체로서의 개인이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실천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연히 문학적 권위의 문제로 귀결된다.

    일제 치하 민족정신의 왜곡과 남북분단의 이념적 편향은 정치·경제·문화·예술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삶을 진영논리의 수렁으로 휘몰아 왔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경우도 한두 경우가 아니다. 민족주의 대의도 완결 짓지 못한 채 민족은 분열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각각 자신의 색깔들을 드러내 온 게 남과 북 우리 민족 모두가 지금껏 걸어 온 길이다.

    여기서 제각각 치켜세운 권위는 혹 권위주의는 아니었는지, 진정한 권위를 억압한 폭력은 아니었는지 반추해 볼 일이다. 권위의 주체와 이를 보는 관찰자 사이에는 서로 권위에 대한 가치인식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이 매우 클 때 갈등은 격화되고 투쟁으로 변할 수도 있다. 문학적 가치인식의 논쟁이 정보 공유도 하지 않은 채 공정성과 투명성을 무시하고, 힘의 논리로 권위가 포장되거나 억압된다면 정의로운 문학적 생태계는 아니다. 지금껏 한국 문단의 생리와 생태가 많은 경우 진영논리에 갇혀 있은 것은 아닌지 이제는 진지하게 반성해볼 일이다.

    진영은 적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힘도 요구된다. 생존을 위해 각자도생으로 줄서기하고 또 줄을 세운다. 물론 진영의 이념적 깃발 아래서. 여기선 상대를 적대함으로써 자신의 진영을 합리화한다. 자칫 집단적 오만과 편견, 허구의 구축과 자기기만이라는 함정에 스스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애써 외면한다.

    문학은 지식이 아니다. 감성의 결과물이다. 본질적으로. 시가 지식 가득 든 머리에서 오는 것인가? 가슴에서 태어나는 것 아니던가. 문학이 아름다울 때 그것은 예술이다. 문학의 예술성 즉 문학적 미학(美學)은 권위주의에서 탈피하는 데서 온다. 진영과 아집과 힘겨루기 그 자체가 권위주의다. 진정한 권위의 발견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진실이 어떻게 존중돼야 하는가의 문제는 또 다른 논의의 문제다.

    마산·창원·진해 우리 지역사회도 우리가 가진 문화적 자산 특히 문학적 자원을 재발견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우리 지역의 문화적 수준을 한층 더 높이리라는 확신을 필자는 갖고 있다. 모두의 창조적 노력이 요구된다.

    김인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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