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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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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부엌의 노래- 문정희

  • 기사입력 : 2018-03-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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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움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가

    간을 맞추는 냄새

    부엌에서는

    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요

    세상이 열린 이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소리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

    촛불과 같이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의 덜미를 푸는

    소름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요

    수줍은 새악시가 홀로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 와요

    우리 부엌에서는


    ☞ 저 작은 ‘우리 부엌에서는’ 꼭두새벽 조왕신께 아들을 애걸하는 칠거지악삼종지의 눈 닫고 귀 닫고 입 닫은 비녀머리 여자가 있고, 헝클어진 머리로 해장국을 끓이는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든 반벙어리 여자가 있고, 오빠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천리만리 낯선 부엌에서 눈물로 모르는 사람의 밥을 짓는 갈레머리 어린처녀가 있고, 주인남자에게 무참히 강간당하고 누명 쓴 죄인처럼 혼자 냉가슴만 앓다 ‘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가 돼버린 시든 들꽃 같은 여자가 있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의 덜미를 푸는/ 소름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오고, 미투미투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뭇별들이 와르르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천지개벽 속에서, 별이 되지 못한 남자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짓밟힌 “저 작은 우리 부엌의 여자사람들은” 미투미투 혼자 냉가슴을 쥐어뜯을 뿐, 이미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난다. 조은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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