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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새로운 눈물- 유희선(시인)

  • 기사입력 : 2018-02-2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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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일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말라’는 대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돌풍을 일으킨 영화 ‘신과 함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대사가 상황에 적절했는지도 의문이 가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눈물에도 새로운 눈물과 새롭지 않은 눈물이 있다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마음이 머물렀다.

    우리는 과연 지나간 일에 대해 새로운 눈물을 흘리고 살까? 혹시 지나간 일에 오래된 눈물만을 흘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눈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나는 어떤 감상에 젖어 울컥하는, 마치 봄날에 내리는 눈발처럼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물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북받치는 슬픔을 어쩌지 못해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오열한 적이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슬픔은 어디로 갔을까? 망각일까, 포기일까, 말끔한 치유였을까? 그 슬픔은 어쩌면 손이 닿지 않는 내면 깊숙한 안전지대로 스며들어 은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E 스트라우트의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곧 눈이 쏟아질 것 같은 증상에 휩싸여 있었다.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나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래된 슬픔이 잿빛 무거운 하늘을 찢고 함박눈처럼 환하게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깊은 슬픔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는 밋밋했을지도 모를 책 한 권이 내게는 새로운 눈물을 흘리게 한 사건이 되었다. 자기 연민으로 단단해진 슬픔을 녹이고 새로운 차원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살아왔던 관성대로 살아가게 된다. 변화를 감당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한 번 설정된 어떤 기억과 관계는 뿌리가 깊다. 나는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에 대해서도 줄곧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깊은 회한과 슬픔은 점점 더 왜곡되고 단단해진다. 본질에서 멀어져 가는 선민의식에 대한 집착은 벽 너머의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그 마지막 벽이 허물어지면 그들의 시야는 어디를 향할 것인가? 끊임없이 울음을 퍼 올리는 그 차가운 벽 너머,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나약한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새로운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슬픔을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는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연로하신 부모를 돌보는 자식들이 많다. 그들은 수행하듯 마지막 이별 준비를 하고 있다. 텅텅 비어가는 그릇을 하루의 일과처럼 말끔히 씻어 엎어 놓는다.

    나는 힘의 우위가 전복된 다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기나긴 삶을 알지 못한다. 꼭 듣고 싶은 말도, 물어 볼 단 한마디의 말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들만큼은 못되어도 분명 내게도 할 일은 있었을 것이다.

    비록 늦었지만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과 나 사이에 정지되었던 시간은 새롭게 흘러갈 것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눈물로 나이 들 수 있기를 꿈꾼다.

    유희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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