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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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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살아서는 진천에, 죽어서는 용인에

  • 기사입력 : 2018-02-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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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의 대표적인 설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경기도 용인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던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던 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면서 큰 바위가 굴러 떨어져 자고 있던 남편을 덮쳐서 그만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혼례를 치른 지 1년도 되지 않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아내는 ‘남편을 살려 달라’며 하늘을 향해 대성통곡을 하였다. 죽은 남편은 저승에서 아직 죽을 때가 안 됐으니 다시 이승으로 가라하여 자신의 몸에 접신을 하려 하였으나 큰 바위 때문에 접신이 되지 않아 영혼이 떠돌게 되었다.

    그 무렵 충청북도 진천에 살던 부잣집 아들이 나이 마흔이 안 돼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자, 혹시나 아들이 다시 살아날까 하는 마음에 장례를 일주일이 되도록 치르지 않고 있었다. 접신을 못하고 있던 용인 남편은 죽은 진천 남편의 몸에 접신하여 살아났으나, 매일같이 진천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자신은 ‘용인에 아내가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자 실제 그곳에 가보니 똑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었다. 진천의 어머니는 용인의 아내를 데리고 진천으로 가서 진천아내와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죽고 나서 용인아내의 아들과 진천아내의 아들이 서로 아버지의 혼백을 모시겠다고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명관으로 이름난 진천군수는 “살아서는 진천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살라”는 판결을 내리자 용인아들이 혼백을 모셔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생겼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일명 ‘쌍유혈(雙乳穴)’이라 불리는 두 묘가 나란히 있다.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와 조선조 명재상인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가 그것이다. 특히 정몽주 선생의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애국충절의 단심가(丹心歌)는 오늘날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출세와 권력만 탐하는 정치가와 권력가에게 꼭 필요한 산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두 묘를 ‘쌍유혈’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후손 발복(發福)으로만 판단한다면 이석형 선생의 묘가 단연 좋은 자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석형 선생 집안에서는 조선시대 부원군 3명, 정승 8명, 대제학 6명, 판서 42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 문과급제자 120명을 배출하였다. 게다가 선조 때에 선생의 신도비를 찬(撰)한 4대손 문충공 월사 이정구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면서 연안 이씨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이석형 선생의 직계 후손들이 벼슬을 많이 하게 되자 정몽주 선생의 묘보다 더 명당이라는 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주산에서 뻗어 내려온 용맥(龍脈·산줄기)은 좌우요동과 상하굴곡을 하면서 힘차게 전진을 하고 있다. 용맥의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고갯마루라 불리는 ‘과협(過峽)’이 뚜렷하게 형성되어 혈처(穴處)가 있음을 가늠케 하는 증거가 되었다. 이를 고서에서는 ‘진룡지과협다(眞龍之過峽多·혈을 형성하는 참된 용은 과협이 많다)’라 한다. 정몽주 선생과 이석형 선생 묘를 포함한 주변은 인작(人作·사람에 의해 꾸밈)으로 조성한 부분이 많지만, 용맥이 직각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 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몽주 선생 묘를 향한 용맥은 마지막 혈을 맺기 위해 방향을 틀었으나 튼 지점 부근은 반발력으로 인해 두툼하게 살이 찌는 현상인 ‘귀성(鬼星)’이 뚜렷하지 않은 반면 이석형 선생 묘를 향한 용맥은 ‘귀성’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또한 정몽주 선생 묘는 방향을 튼 후의 용맥이 묘소까지 변화 없이 뻗어 가는 직룡(直龍)인 데 비해 이석형 선생 묘까지 도달하는 용맥은 꽤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풍수적인 비교분석에도 불구하고 지근거리에 있는 두 묘는 한 뿌리에서 나온 전형적인 ‘좋은 자리’임은 부인할 수 없다.

    용인시는 빼어난 산세와 함께 맑은 물이 어우러져서 지기(地氣)가 좋은 까닭에 이름 있는 무덤들이 많은 고장이지만, 역사가 숨을 쉬는 훌륭한 고장으로 잘 가꾸고 알려서 이제는 ‘생거용인’이 되는 양택(陽宅·산 사람의 거주 공간)의 명소가 되었으면 한다.

    주 재 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화산풍수·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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