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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달빛에 걸어놓은 나무의 언어를 읽는다- 김용권(시인)

  • 기사입력 : 2017-09-0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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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나무는 속을 비워 악기가 되었다. 도시의 정각에서 목쉰 바람소리로 울었다. 어떤 나무는 결을 메워 주련이 되었다. 틀어진 기둥에 기대어 천년을 살았다. 각을 새긴 나무는 세상에 없는 선, 결, 색을 보여 주었다. 바람은 나무 곁에서 울다 죽었고 사람은 나무 곁에서 살았다.

    나무에는 달빛이 걸어놓은 언어가 있다.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새의 울음소리, 바람소리를 몸으로 새기는 것이다. 나무에 혼을 불어 넣는 서각은 오래전부터 현판이나 주련 또는 경판으로 사찰이나 서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풍광 좋은 야외로 나가면 팔각정이라는 쉼터가 있다. 오래된 정자에는 건축의 연혁과 글쓴이의 이름이 각자되어 있다. 면면이 살펴보면 당대에 존경받았거나 덕망 있는 분들임을 알 수가 있다.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문장의 의미를 새기거나 감상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공민왕이 피난길에 썼다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경북 안동군에 걸려있는 ‘안동웅부’는 가장 오래된 현판으로 많은 이로부터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서각은 문자전달 역할과 공예적인 면에서 독특한 문화예술의 매개체로 인식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화려한 기교와 색채가 가미된 진보적인 미술 형태로 나타난 각은 글자를 상용화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얼굴로써, 절대적인 홍보의 역할도 하고 있다.

    요즘 올린 야외 정자나 쉼터에도 현판을 위엄 있게 걸어놓았다. 땀을 식히면서 중수기를 읽어본다. 중수 배경과 함께 각자되어 있는 글들은 모두가 공치사 일색이다. 작가의 낙관을 보니 대부분 지자체 대표나 권력층의 이름으로 버젓이 붙어 있다. 불협화음이다. 건축물과의 조화, 사람과의 조화를 잃어버렸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의 부친 김노경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해인사 중창 현판을 사양했다고 한다. 그는 글을 못 써서가 아니라 팔만대장경 경판의 글씨를 보고 “사람의 글씨가 아닌 신의 글씨”라며 자신을 낮추었던 것이다. 현판의 글씨나 각은 그 의미나 상징성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것이어서, 자신의 예술관과 문화관을 먼저 떠올린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에 가보면 문화재는 물론, 가게마다 서 있는 간판이 예술임을 알 수 있다. 간판은 독특한 문장으로 서체를 올렸거나 각으로 새겨 손님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지나다가 아름다운 조형의 간판을 보고는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이처럼 간판 하나에도 그 기능과 미적 가치를 살려서 겸양의 내 얼굴처럼 걸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살아나는 것이다.

    나무에는 신목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죽어 마지막 관 하나 짜는 것도 나무에는 평온한 휴식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는 염원 때문이리라. 꽃피는 봄날 화려한 그 영화도, 단풍 들고 잎 지는 계절의 아우성도, 단단히 새기면서 간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 한 번 죽음으로 일어서는 나무의 계절이었다.

    침묵하는 정각 앞에 선다. 나무의 일생을 읽는다. 후대에 너와 내가 다녀가고 또, 누군가를 외롭지 않게 기다릴 것이다. 나는 달빛에 걸어놓은 나무의 언어를 어느 도시의 정각에서 읽고 있다.

    김 용 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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