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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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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집안에 도마 소리 있게 하라- 이경순(동화작가)

  • 기사입력 : 2017-02-1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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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년 전, 한꺼번에 냉이를 많이 산 적이 있다. 꽃대가 올라오기 전에 얼려두고 여름에 먹을 생각이었다.

    냉이를 다듬으며 TV를 봤다. 한국인의 정서를 담고 있어 평소에도 즐겨 보던 프로였다.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에 곁들여 음식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진동의 한 해녀가 자연산 미더덕으로 요리하며 추억을 얘기했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 소식을 들은 엄마가 일하다 말고 맨발로 달려왔단다.

    가난한 시절, 냉장고가 없던 엄마는 단지에 소금으로 절여 놓았던 미더덕을 꺼내 미역국을 끓여줬단다. 참 맛있었노라 얘기하며 끝내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에 전염돼 냉이를 다듬는 내 손도 느려졌다.

    당신은 어떤 음식에 추억이 있는가?

    어느 시인은 눈 오는 날이면 외할머니가 만들어준 탕평채가 그립다고 했다. 원한다면 맛집에서 사 먹을 수 있지만, 탕평채를 만들어 주시던 외할머니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음식은 배부르기 위해 먹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힘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체로 사람들이 추억하는 음식은 어릴 적 즐겨 먹었거나, 가난한 날 허기를 달래줬거나, 자기만의 사연이 깃든 음식일 것이다.

    선인들은 ‘집안에 아이들 웃음소리, 책 읽는 소리, 도마 소리 있게 하라’고 했다.

    참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가르침이다. 아이들 웃음소리 없는 집이 평화로울 리 없다.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여기서 책 읽는 소리란 책에만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의미하는 뜻이리라.

    도마 소리란 집안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소리다. 어미가 자식 입에 들어갈 음식을 만드는 일이니 얼마나 정성스럽겠는가?

    조미료 대신 정성이 들어간 건강한 밥상에 식구들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그날 있었던 얘기를 하며 밥을 먹는 시간도 언젠가는 다시 못 올 그리운 시간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시절 먹던 음식으로 그리운 시간을 대신한다.

    내가 쑥국이나 냉이된장국을 좋아하는 것도 단순히 쑥과 냉이만 좋아서가 아니다. 어린 시절 봄날에 언니들과 들판을 쏘다니며 쑥을 캐던 추억이 스며 있어서다.

    요즘은 한겨울에도 쑥이며 냉이가 시장에 나온다. ‘이 추위에 벌써’라며 의아해했는데 들판에 절로 자란 봄나물이 아니라 농가에서 다량 재배한 상품이었다. 냉이나 쑥도 길러내는 작물이 되었구나 생각하니 어쩐지 서운했다.

    그렇다 한들 내 기억 속에 있는 고향 들판과 나물 캐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어쨌든 나는 냉동실에 넣어 둔 냉이로 여름날에도 냉이된장국을 먹으며 봄날을 떠올리겠지만, 냉동하지 않아도 꺼낼 때마다 생생한 무언가를 사람들은 지니고 있다. 봄나물의 향긋함 같은, 또는 다르더라도 자신만의 추억으로 인해 소중한 무엇을.

    그러니 집안에 도마 소리 있게 하자. 오늘 내가 차리는 한 끼 밥상이 식구들에게 건강은 물론이고 언젠가는 그립고 귀한 추억거리가 될지 모르니.

    이경순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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