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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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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가치 있는 삶- 강현순(수필가)

  • 기사입력 : 2016-09-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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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신문을 펼치거나 티브이를 켜기가 겁이 난다. 유례 없는 각종 사고로 인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인명사고가 가장 가슴을 에이게 한다. 설혹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과는 무관한 사이더라도 잠시나마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뜻밖의 사고로 목숨이 허망하게 스러져가는 모습을 보면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겠지만 급작스러운 그와의 만남은 준비도 제대로 못했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남겨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작별인사도 불가능했을 것이며 누군가는 숙망의 성취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기 마련이어서 오래오래 두려워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가 느닷없이 찾아오는 편이 낫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위안의 말일 터.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이 시작된다”라는 말에 고개를 가로저을 수가 없다. ‘죽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냅다 다가온다. 부유한 사람이라고, 권력 있는 사람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 착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므로 조용히 그를 맞을 수밖에 없다. 그는 동작이 워낙 잽싸서 금방 이쪽에 있는가 싶더니 어느새 저쪽에 가 있다. 곳곳에 매복해 있는 복병이나 다름없다. 두려워서 숨어도 끝내 찾아내고 도망을 가더라도 어디든 쫓아온다. 그와 잠시 맞서 싸울 수는 있겠지만 결코 당해낼 수는 없다.

    이렇듯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종교계에서는 죽은 다음에도 또 다른 삶이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내세의 행복한 생활을 약속하지만 큰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살아가면서, 다가올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그를 만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해놓을 텐데.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철학관이나 점집을 찾기도 하지만 결단코 확고한 정답을 받아내지는 못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기쁨과 슬픔, 불행과 행복으로 점철된 생애였기에 이제 그와 맞닥뜨려도 여한이 없을 듯싶다. 그러니 비굴하거나 비참한 모습이 아닌, 의롭고 떳떳한 자세로 그를 만나야 하지 않을까.

    장례식장에 가 보면 고인이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무표정한 가족과 조문객을 보노라면 가히 좋은 일생이 아니었음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다. 쉼 없이 흐느끼는 가족들과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오열을 토하는 문상객들을 보면 고인이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빛깔 고운 잘 익은 열매 하나가 떨어져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사람은 죽어서야 비로소 삶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라는 걸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다.

    한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하다 삶을 마감했는지를 알면 대체로 지난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잘 몰랐던 사실들, 비밀들이 쏙쏙 드러나기 때문이다.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역사 속의 ‘의인’들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반듯한 삶을 산 사람이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장소에서 심장이 멎을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또한 악명 높은 자가 성스러운 곳에서 눈을 감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보람 있는 하루를 끝내면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 하루하루 참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매진하다 보면 행복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을까.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므로.

    강현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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