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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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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기억의 곳간- 김영미(수필가)

  • 기사입력 : 2016-02-2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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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어머니는 이웃 잔치 품앗이로 손수 만든 두부나 메밀묵을 차곡차곡 함지박에 담아 이고 가셨다. 외갓집에서 빌려 온 맷돌에 불린 콩을 한 숟가락씩 퍼 넣어 몇 시간씩 갈았다. 작은언니는 매운 연기를 마셔 가며 아궁이에 불을 지폈고, 가마솥에다 콩물을 부어 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굵은 소금자루에서 뺀 간수를 가지러 간 뒤, 나는 두부 거품이 끓어오를 때마다 물 한 바가지를 끼얹어야 했다.

    다음 날은 길고 널찍한 주걱으로 노를 젓듯 묵을 저어가며 메밀묵을 쑤었다. 날마다 어머니의 노동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삶의 군데군데 떠오르는 기억의 고방들. 명절이면 맛볼 수 있었던 담백한 메밀묵과 구수한 두부의 맛이 새삼 그리워진다.

    부엌에는 맛있는 밥이 다 되었다고 밥솥이 친절한 안내 멘트를 들려준다. 시시각각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지,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야만 하지 않았을까.

    3초면 날아드는 이메일과 SNS, 점심을 무얼 먹고 있는지, 무슨 옷을 입고 세계 명소를 두루두루 여행하고 있는지 빠르게 전해진다. 최첨단의 기계에 기억을 저장하며 하루를 공유한다.

    가끔 찾는 마트에 ‘손가락만 까딱하면 모든 상품이 집으로’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쇼핑을 할 수 있다는 광고 문구다. 삼만원 이상 구매하면 배달이 가능한 편리함 때문에 필요 없는 물건이나 먹을거리를 더 사기도 한다.

    전국 어디나 갈 수 있다는 퀵서비스, 싱싱한 해산물과 채소는 산지에서의 신선도를 유지한 채 집으로 도착한다. 손가락만 까딱해 채워진 장바구니는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홈쇼핑에서 구입한 자잘한 생필품은 한달음에 문 앞으로 달려온다. 느닷없이 손님이 찾아와도 간단한 찜 하나를 시켜 먹고, 부모가 집을 비워도 아이들은 각자 입맛에 따라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사무실 벽과 집 냉장고에 치킨집과 중국집 전단지가 한 식구처럼 붙어있다. 통계에는 일주일에 50% 이상이 외식을 하며 발 빠른 배달음식에 의존한다고 한다. 잔치음식은 물론이고, 정성이 담겨야 할 차례음식도 값을 치르고 종종 주문을 한다. 명절에는 튀김이나 전을 사기 위해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 긴 줄을 서 있는 풍경도 낯설지 않다.

    식탁에 마주앉아 밥을 먹으면서 온기를 나눌 수 없는 벽이 느껴진다. 눈과 귀를 사로잡는 곳에 뭉텅뭉텅 잘려나간 공평하지 못한 시간들이 비명을 지른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친권을 잘못 휘두른 죄, 기르는 강아지에게 밥을 주면서 아이를 굶긴 어미의 죄, 맨발로 어린아이가 배관을 타고 집을 탈출하기까지의 기억을 누가 무엇으로 책임져 줄 것인지? 사회의 무관심에 대해 뼈아픈 질책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봄의 기별처럼 따뜻한 뉴스에도 귀를 열어 기억의 고방을 채워보자. 손가락이 절단된 소녀의 수술을 돕기 위해 차량들이 일제히 길을 터주는 ‘모세의 기적’ 같은 뉴스나, 한 사람의 장기기증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는 기적의 릴레이는 뛰어난 대처능력과 훈훈한 우리들만의 감성이 아니겠는가.

    담장 밑에는 추위를 이겨낸 천리향이 봉싯한 꽃술을 내밀었다. 모두의 가슴속에 바야흐로 봄의 말발굽소리가 들려오길 염원해 본다.

    김영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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