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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5월 2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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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부동성의 액자화를 위하여- 전문수(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5-11-1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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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모든 사물의 끝없는 변화들은 새로움에 대한 신선함을 주지만 두려움의 공포를 동시에 안겨주는 양날의 칼처럼 모순적이다. 또한 이런 변화의 실제 동영상들은 그 속도가 실은 가공적으로 빠르기 때문에 우리들 의식 내부는 촌시도 희비의 연속적 공포 속에서 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이는 지구의 자전속도가 시속 약 1600㎞이고 공전 속도가 10만7100㎞라면 우리는 가공스러운 속도의 시간 속에서 매일을 보내고 있다. 만일 우리가 달리는 기차의 창밖을 보듯 지구 밖의 우주를 볼 수 있다면 과연 어떤 공포를 절감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의 인체가 하루에 건강한 사람의 경우 1000억개의 세포가 죽고 분열을 통해서 교체된다고 하는데 이 또한 얼마나 가공스러운 죽음의 속도인가 싶다. 우리의 일상 정신 작용이 왜 그렇게도 찰나인지를 가히 짐작하게 한다. 이런 공포 속도에서 우리들의 안정된 마음이 과연 하루에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일찍이 우리의 선학들은 이런 변화의 무서운 공포 속도에서 우리들의 평온한 마음을 잡아 정복할 수 있는 미적 범주를 합의해 왔는데 저간에 익히 알아 온 미의 4대 영역이라 생각한다. 즉 숭고미, 우아미, 비장미, 골계미의 미적 감성 내지 정서의 정신적 가치에 대한 치열한 논의들일 것이다. 필자가 그간 이런 문제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한 방편으로 예술가들의 액자화에 대한 중요성과 위대함을 자주 언급해 왔는데 역시 그 액자화 범주 역시 크게 분류하면 이 4대 미학 영역이다. 인간이 겪어야 하는 가공스러운 사물들의 변화에 대한 동영상들 중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을 포착하여 아름다움을 액자화함으로써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도록 예술가들은 우리들에게 위대한 제공을 해 온 것이다.

    이를 좀 어려운 철학적 말로 하면 즉자화(卽自化)라는 욕구인데 삶의 가장 평화롭고 가치 있는 마음의 한순간을 영구히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살아온 모든 시간의 동영상들은 일시에 한줌 재로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동상이 세워지고 비석이 세워지고 건축물, 조각, 그림, 서예, 그리고 문인들의 모든 문학 작품들이 창작된 것이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창작이란 말을 다시 새겨본다면 가장 가치 있는 것의 발견과 구체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영구히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방법과 노력은 이런 창작품 제작밖에는 없다. 이를 1800년대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요 문학가인 알랭은 그의 <예술 노트>에서 부동성의 정복이란 기발한 말로 예술론을 폈는데, 필자의 액자성은 그의 담론성(談論性)과 굳건히 연계된다고 본다. 예술가는 삶의 동영상 중 어느 한순간의 자기 세계를 부동성으로 정복해 낸다는 것이다. 왜 우리들이 사진 찍기를 그리 좋아하는지를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계가 정복한 사진은 진정한 부동성과는 멀지만 요즘 소위 사진작가들은 비록 기계를 빌리지만 자기 자신의 개별적 세계화를 노리기도 한다. 여기서 굳이 부연해 둘 것은 요즈음은 기계가 동영상을 영구히 정복하려고 하고 있다. 스마트폰은 대중들의 이 시간 공포의 불안 심리들을 아주 영악하게 이용해 상품화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런 동영상은 아무리 촬영이 잘 되어도 예술의 모조품이고 소모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영상의 영구화에는 사사문학이 잇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소설이다. 이제 우리들은 앞으로 시대가 어디로 갈 것인지가 비교적 명확히 예견될 것이다. 바로 예술 세계가 그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전문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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