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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5월 2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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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한 치 앞 보기- 홍진기(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15-10-3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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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주제에 남 걱정한다는 말이 떠올라 퍽 조심스럽다. 그러나 어디, 사람이 남의 말 한다고 제 자신은 완벽하더냐란 변명을 달면서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속끓이게 하는 사연 한 토막을 들어 변죽이라도 쳐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어쩌면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내 이 말이 헛짚는 말이 되기를 소망한다.

    요즘도 자주 보게 되는 대중탕에서 있었던 일 한 토막―건장하고 허우대 멀쩡하여 나무랄 데 없는 젊은이 몇이 목욕을 마치고 나갔다. 그런데 그들이 떠난 뒷자리는 멀쩡하지가 않았다. 보기만도 민망스럽고‘아니, 저럴 수가’ 하는 생각이 딱하다 못해 스스럽기도 했다.

    오늘날 이 사회를 지나 먼 다음 세대를 넘짚을 때는 그 실망감이 가정의 교육문제로 건너갔다. 모름지기 많은 덕목들은 따사한 가정교육에서 비롯돼 학교교육에서 굳어지고, 다시 돌아 사회생활에서 그 보람이 도도해지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됨됨이와 삶의 헤아림에서 무르익는 법이 아니던가 하는 데까지 치달았다. 저리도 제 몸 하나 다스림이 저러할진대 어디서 예도와 사회덕목을 찾겠는가 하는 생각에 미칠 때는 사뭇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덕목이나 기강이 어디 부르짖기만 한다고 도타워질 것이며, 어거지로 들이민다고 통하기나 할 일인가. 오늘날 우리 교육이 지탄의 관혁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 그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속을 앓고 있는데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내 얼굴에서 내 속을 읽으셨는지 그들이 떠난 자리에 대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분노의 폭발일시 분명했다. 그것도 저 멀리 지난 시간, 예전의 일본인과 비교를 해가면서.

    샤워기는 바닥에 동그라져 있고, 세숫대야는 비눗물과 땟국을 반쯤 담아 안고 이리저리 내동댕이 흩어진 채로다. 몸을 씻던 타월은 비누거품을 뒤집어쓰고는 바닥에 널브러져 몸을 비비 꼬고 있는가 하면, 깔판(걸상)에는 시꺼먼 덕지때가 이겨붙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도덕적 양심이 이 난장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어떤 말로도 변명이 될 수 없는 이 난장판, 저 개망나니. 할아버지의 말씀은 이어진다. 자기가 사용했던 물건 하나하나를 모두 챙겨 두 번 손 가지 않게 깨끗이 씻어서 있던 자리에 정리해두고 주변에 튀어나간 비누거품까지 말끔하게 씻어낸다는 일본인들의 그 바른 예도를 듣고 나는 순간 일제 강점기를 떠올렸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속가슴에 열꽃이 피는 느낌이었다. 이건 교육 이전의 인간문제라는 생각과 이들뿐이 아니라는 심각성이 나를 더욱 아프게 했다. 초·중학생도 예외가 아니었구나 하는 통절, 여기에 우리가 물러설 수도 주저앉아 쉴 수도 없는 우려와 아파해야 할 고민이 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이면서 엄숙한 명령일시 분명하다. 이미 우리 앞에 던져진 사회의 시그널을, 우리들의 자동화되다시피 한 무감각증과 방관성이 외면해버렸다는 씻을 수 없는 과오가 오늘 나의 맨살을 찢는 비수가 되어 돌아왔구나 하는 회오와 죄책감, 참기가 힘들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경술국치를 거쳐 휴전선 철조망을 탄띠처럼 감고 있는 내 조국의 오늘이 주는 이 몸떨림을 어찌하랴.

    아무리 수고로워도 가야 할 길이 있고, 아무리 편해도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우리에겐 있다.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이 이를 깨닫게 해주지 않았던가.

    홍진기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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