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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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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인지상정(人之常情)- 황시은(시인)

  • 기사입력 : 2015-02-1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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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에 대한 지나친 배려가 피를 부르고 말았다. 대중목욕탕 샤워기 앞에 나란히 앉은 한 어르신의 소지품을 차근차근 정리해 드린다는 것이 그만 잘못하여 나는 피를 흘리고만 말았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나 보다. 내 손엔 피가 뚝뚝 흐르고 있는데 어르신은 오히려 자기를 놀라게 했다며 소리 높여 야단을 치는 것이다. 연세로 보아 나 같은 딸이 있을 법한 분이 어떻게 저리 매정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자기 소지품을 챙기다 그리 된 것을, 위로는커녕 오히려 꾸짖다니. 나는 당황스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으나 정중히 사과를 드려야 했다. 상대를 배려한다고 한 행위가 이토록 가슴 아픈 독화살이 돼 돌아오리라고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아프고 쓰렸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는 보편적인 정이 있다. 이것을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한다. 지구 상에서 인간은 혼자만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다.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만나도 놀이를 하거나 함께 일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된다. 이런 관계가 발전해 아름다운 가족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를, 국가를 이루게 된다. 멀리 있는 내 형제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사촌이 더 낫다는 옛말이 틀린 데 하나 없는 오늘이다.

    기본적인 인간의 속성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시대와 지역에 맞는 삶의 윤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돼 인간사회는 신뢰의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따라서 어느 사회 어느 시대이든 상식이 통용되는 인지상정의 세상이야말로 살맛나는 세상인 것이다.

    나는 요즘 학원 수업을 위해 하루에 네 번을 도시와 시골을 오가는 농어촌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검정색 정장 차림에 중절모를 쓴, 일흔은 충분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다섯 분이 버스에 올랐다.

    “어디를 그렇게 다정히 다녀오세요?” 버스 기사님이 넌지시 인사 삼아 말을 건다.

    “멀리서 점심 한 끼 먹자고 여기까지 왔다네.”

    일행 중 한 할아버지가 멋쩍게 웃으신다. 그때 붉은 신호등 앞에 버스가 걸음을 멈춘다.

    “다음부터는 조오기 장미아파트 오른쪽 골목으로 오르시면 좋은 데 많습니다.” 기사님이 하얀 목장갑으로 가리키며 안내를 한다.

    “허허. 우리 기사님이 하도 고마워서 다음 주엔 꼭 그곳으로 가야겠소.” 할아버지께서는 기분 좋게 웃으시며 목장갑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신다.

    할아버지 일행이 정말 그 식당을 찾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사님의 붙임성 있는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은 할아버지의 응수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인심이다. 기사님의 친절한 말 한마디에 버스 안의 분위기는 온통 시골 사랑방처럼 훈훈해진다.

    그 시간에 만나는 시골 인심은 정답기 그지없다. 흙내 물신 풍기는 시골 아낙의 투박한 사투리에서 나의 지친 하루가 충전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분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엔 어느새 노오란 얼음새꽃이 피는가 했더니 다쳤던 손에 햇살 한 줌 내려 앉아 새 살을 채워주고 있다.

    황시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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