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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꼬] ‘살아있는 역사’ 경남의 城 탐방

  • 기사입력 : 2015-01-29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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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남강 둔치에서 바라본 촉석루(왼쪽)와 촉석문./성승건 기자/

    우리나라는 유럽의 고색창연하거나 화려한 성(城),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거대한 성은 없지만 ‘성곽의 나라’라고 할 만큼 그 수가 많다. 현재까지 조사된 우리나라의 성곽은 1702개가 있고 경남에만 264개가 있다. 이처럼 많은 성곽의 아래에는 유사 이래 1000건에 달하는 외침(外侵)을 당한 슬픈 역사가 깔려 있다. 잦은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의 생명을 지켜주던 성의 의미는 퇴색하고, 복원된 일부 성 외에는 대부분 세월 속에 무너지고 방치돼 존재조차 희미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은 과거의 유산 정도로 치부될 뿐이지만 무너지고 허물어진 성곽의 흙더미에서 당시를 살아내온 사람들의 치열한 역사가 현재를 사는 우리 삶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준다.



    논개의 충절 진주성


    촉석루와 논개가 먼저 떠오르는 곳. 진주성이다.

    남쪽 절벽 아래 남강이 유유히 흐르고,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 촉석루가 우뚝 솟아 사계절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1, 2차 전쟁에서 일본군과 맞서 7만여 민관군이 목숨을 잃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아름다운 촉석루 누각이 있고 논개의 전설이 전해오지만,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1592년 10월, 왜군 2만여명이 침공해 오자 김시민 목사가 3800여 군사를 이끌고 승리한다. 그러나 8개월 뒤인 1593년 6월 왜군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재침입하자 결국 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로부터 422년이 지난 지금 진주성은 부모의 손을 잡고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연인들의 화사한 미소가 끊이지 않는 산책 코스가 됐다.

    남쪽 절벽 아래 남강을 두고 도심에 자리 잡은 진주성은 복원됐지만 옛 성터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진주성의 축조 시기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흙으로 쌓은 성이 무너지자 고려 우왕 5년 (1379) 때 걷어내고 다시 돌로 쌓았다고 한다.

    애환도 많았다. 일본군은 성을 함락하고 곧바로 성벽을 무너뜨렸다. 이후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쌓았는데 성의 규모가 너무 커 방어하기 어려웠다는 판단에 따라 성의 규모를 대폭 줄였다.

    진주성은 일제강점기 때 외성의 성벽을 뜯어내 연못 매립공사에 사용되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는다. 1950년 6·25전쟁 때는 촉석루가 불에 타 1960년에 복원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797년부터는 진주성 전체에 대한 복원사업이 시작돼 당시 성내에 살던 민간 750여 가구가 철거됐다. 아쉽게도 성은 남았지만 사람은 사라지고 말았다. 성안 서쪽에는 진주박물관이 들어서고, 개천예술제 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고 시민들의 문화휴식공간으로 거듭났다.

    장어거리로 유명한 남강다리편에 있는 촉석문에서 표를 구입(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초등학생 600원)해 성곽을 따라 성내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가량.

    촉석루에 올라 남강을 내려다보고, 논개의 전설이 어린 의암은 반드시 들러봐야할 코스다. 바로 옆에는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영정과 위패를 모신 의기사 사당이 있고, 임진왜란 때 순국한 7만여 민관군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임진대첩계사순의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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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진주성의 서문인 서장대가 나온다.

    남강이 바라보이는 성곽을 따라 가면 진주성에서 가장 높은 망루인 서장대가 나온다. 절벽 아래 도심이 훤하게 내려다보여 가슴이 뻥 뚫리는 곳이다.

    성 안에는 2개의 사찰이 있다. 2차 진주성 전투 때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신 창렬사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웠다가 진주성싸움에서 전사한 승려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바꾼 호국사가 있다.

    진주성 한가운데는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영남포정사 문루가 있다. 지금의 경남도청 정문에 해당하는 곳이다.

    진주성 내에는 1984년 개관한 임진왜란 전문역사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임진왜란과 관련한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고 관람은 무료다.



    오천년 역사를 지켜온 성곽의 기원


    성(城)이 언제부터 축성됐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학계에서는 기원전 2세기경으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나무기둥으로 엮은 목책성이었다가 토성으로 발전했다. 적을 막기에는 터무니없이 허술해 보였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돌로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경부터다. 점점 성을 쌓는 기술이 발달한 것은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다. 특히 고구려와 신라의 중간에 끼이고 왜구의 침략까지 받은 백제는 가장 많은 성을 쌓는 등 잦은 전쟁은 더 튼튼하고 높은 성을 짓게 만들었다.

    경남은 백제부터 신라와 가야국까지 얽히고설켜 당시의 성터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원래 성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이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났다. 주로 주변 야산과 높은 산봉우리를 지형지물로 삼아 흙과 돌로 쌓은 군사시설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생존과 직결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국력의 상당수를 성을 쌓는 데 소진했다.

    하지만 성이라고 다 같은 성은 아니다. 방어적인 군사시설이 대표적이지만 수도나 지방 고을의 행정을 위해 성을 쌓기도 했다. 만리장성처럼 적군이 넘어오지 못하게 국경선을 따라 길게 쌓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의 성은 또 다르다. 독일의 고성들은 산꼭대기나 접근이 어려운 언덕 위에 성을 지었고 여러 개의 관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용도로 지었다면 프랑스의 성들은 주로 평지에 있다. 영주들이 영토를 소유하면서 향락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프랑스의 성들은 넓고 아름다운 정원과 호수 등으로 이뤄져 있다.


    성을 둘러보기 위한 준비

    진주성과 같은 도심에 위치한 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성은 야산이나 높은 산봉우리에 있다. 때문에 가까운 도심의 성은 산책 가는 기분으로 나서도 되지만 다른 성은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나서야 한다. 출발 전에는 성의 위치와 연혁을 사전에 살펴보는 게 좋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산성은 외진 곳이 많아 혼자보다는 여러 명이 같이 가는 것이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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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분산성

    ★ 가볼만한 경남의 주요 성(城)

    가야의 숨결 김해 분산성과 읍성

    낙동강 하류의 넓은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분산의 정상에 둘레 약 900m에 걸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고종 8년(1871)에 다시 쌓았고, 최근 복원작업으로 옛 성벽과 복원구간이 온전한 원형을 찾아가고 있다. 현재 성 안에 우물과 암자, 그리고 민가가 있으며 산꼭대기에는 3기의 비석도 있다.

    김해읍성은 일제 때 내려진 읍성철거정책으로 해체됐고, 도시개발로 완전히 사라졌다가 지난 2006년 발굴을 통해 김해 동상동 일원 현 위치에 북문을 복원했다.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던 왜구를 대비해 축조한 성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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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 거류산성

    소가야의 흔적 고성 거류산성

    고성군 거류면 해발 571m의 거류산에 있는 이 산성은 산 정상부에서 서쪽 경사면을 성내로 돌로 쌓았다. 소가야가 신라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성벽은 주로 절벽을 이용하고 그 사이에 돌을 쌓아 보강한 형태로, 둘레는 1400m에 이른다. 그러나 대부분 훼손되고, 현재 둘레 600m, 높이 3m, 폭 4m 정도만 남아 있다. 성 남쪽에 문터가 있으며, 성 안에는 우물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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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읍성

    왜적을 몰아낸 사천읍성

    사천읍 선인리 일대에 있는 사천읍성은 돌과 흙으로 쌓은 성곽이다. 약 1.5㎞의 둘레 중 현재는 약 300m의 성곽이 남아 있다. 이 성은 세종 24년(1442)에 병조참판 신인손이 왕명에 의해 쌓았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함락됐었지만 선조 32년(1598) 정기룡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연합해 혈전을 벌인 끝에 성을 탈환했다. 현재 성 안에는 충혼탑, 수양루, 활을 쏘는 관덕정이 있는 공원이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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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 선진리성

    왜적이 세운 사천선진리성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장기전을 대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18개의 왜성을 지었다. 진해 웅천왜성, 안골포왜성과 명동왜성을 비롯해 사천선진리성도 대표적인 왜성이다. 일제의 잔재지만 살아있는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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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포 각산산성

    몽고군과 항전한 각산산성

    삼천포항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석축 산성으로 백제 30대 무왕(605) 때 지었다는 설과 고려시대 때라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시대 삼별초난과 공민왕 때 왜구가 몰려오자 백성들이 산성으로 올라가 항전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성벽은 242m, 높이 3m로 일부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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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화왕산성

    곽재우 장군의 의병 근거지 창녕 화왕산성

    화왕산 정상부를 둘러싼 산성이다. 둘레만 약 2600m 규모로 크다. 가야성으로 전해지고 있고 조선시대까지 사용됐으며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근거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성내에서는 밖을 보기 쉽지만 성 밖에서는 볼 수 없게 만든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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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폐왕성지

    왕이 피신해 머문 폐왕성지와 오량성

    폐왕성지는 고려 의종 24년(1170) 정중부의 난으로 왕이 폐위돼 이곳에 피신해 머물렀다고 붙여진 명칭이다. 둔덕면과 사등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석축산성이다. 견내량과 가까워 거제도에서는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다. 성에는 원형연못(직경 12.5m, 깊이 3.6m)도 있으며 7세기 후반에 처음 짓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거제도에서는 가장 일찍 축조된 성곽이다. 현재 둘레 526m, 높이 5.5m의 성곽이 남아있다.

    거제시 사등면에 있는 오량성은 조선 연산군 6년(1500)에 쌓은 성으로, 둘레는 1172m, 높이 2.61m, 폭 5m 정도이고 북쪽과 서쪽이 양호한 상태이다. 성 안은 대부분 민가가 들어선 마을이고 성 밖은 논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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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성

    삼도수군통제영 본영 통영성

    조선 숙종 4년(1678)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을 중심으로 축성했다. 그러나 1894년 통제영이 폐지되면서 방치돼 성이 허물어져 지금은 통영 중앙동 항남동 문화동 명정동 주위 몇 군데에만 석축이 남아있다. 현재 통영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의 북포루를 중심으로 성벽 일부 구간이 복원 정비돼 있고, 충렬사 부근에 일부 잔존성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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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 거열산성

    백제 부흥군의 근거지 거창 거열산성

    거창에는 고대 산성으로 추정되는 성곽들이 곳곳에 있지만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거열산성은 건흥산의 정상부를 감싸는 둘레 약 1.1km 의 석축산성이다.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성이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싸움을 했던 곳으로 전해 온다. 신라 문무왕 3년(663) 이곳에 있던 신라군이 백제의 부흥운동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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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 소을비포성

    군사요충지 고성 소을비포성

    이곳은 사량도를 방패 삼아 고성 하일면 동화리와 춘암리 사이 깊숙한 내만에 형성한 요새다. 조선 전기 군사상 요충지로 역할을 했다. 현재 남쪽 암문 1개소와 문루를 갖춘 북문 1개소가 복원됐고 성벽 전 구간이 복원돼 성터의 모습을 잘 재현해 놓고 있다. 성의 둘레는 약 330m다.


    글=이현근 기자
    사진= 성승건 기자·일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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