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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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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자극과 반응 사이, 쿠션- 천융희(시인)

  • 기사입력 : 2014-11-1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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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엽 타는 냄새가 그리운 탓인가. 구르몽의 시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엎드려 ‘낙엽’ 하나 주워본다. 밟으면 날갯소리 같고 여자의 옷자락 끌리는 소리 같다는 시인의 문장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가로수 아래로 몇 정거장을 더 걸어 서점에 들렀다.

    주로 읽던 종교 서적 속에 책갈피를 끼우듯 몇 권 시집을 읽는 게 고작인 터였다. 자연이 보내준 단풍을 선물로 받고 나니 새삼 자신을 비춰보게 된다. 낙엽 더미처럼 쌓인 책 속에서 보물 하나를 발견했다. 자기계발서인 조신영의 ‘쿠션’이다. 자칭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 자신에게 건네는 선물이라면 조소감이 될까? 단풍을 보료로 깔고 앉아 세 시간 만에 읽었다. 양서는 부피보다 질량이다. 온고지정(溫故之情)이 살아났다. 지금까지 그저 의미를 두지 않고 보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의자나 승용차 등받이를 비롯한 물질계에 있는 모든 ‘쿠션’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 바람에 마음의 쿠션까지 챙기게 됐다. 첨단의 시대는 날마다 새로운 상품들을 쏟아내고, 쇼핑호스트는 입심으로 눈을 현혹하기에 혈안이 돼 있다. 와중 매트리스의 쿠션 성능에 새삼 관심을 붙박는다. 현대인들의 수명을 100년으로 가정했을 때 먹고 일하는 시간을 빼고 나면 수면으로 보내는 시간이 일생의 30%에 속한다고 한다. 안락함을 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에 광고에 넋을 빼놓을 만도 하다.

    우리 집 안방과 아이들 침대는 모두 10년이 지난 물건들이다. 육중한 체구에 짓눌린 자리마다 물 먹은 솜이불 같다. 거실 소파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함께한 것들에 익숙해서인지 나는 버릴 수 없는 조강지처인 양 불편함을 모르고 산다.

    하지만 어쩌다 남편의 출장길을 따라 호텔에 묵을 때면 그 폭신한 촉감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다. ‘쿠션’이 준 성능 때문이다.

    펄 발레리의 말에 의하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것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감정과 생각이 뒤따른다는 뜻이다. 불쾌하면 분노를, 두려움에 몰리면 불안을 선택하는, 즉 노력이 필요치 않은 선택만을 주워 담는 것이다.

    정반대의 라이프스타일이 있다. ‘생각’을 다스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상황 전개가 달라진다.

    작금은 스트레스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른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스트레스 받는다. 열 받는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다 뻑 하면 목숨까지 죽음에 저당 잡히고 만다.

    공자가 그의 제자인 안회의 물음에 “극기복례(克己復禮) 함으로써 인간다움을 이룬다. 하루라도 극기복례하면 온 세상이 인간다움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간다움을 이루는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겠는가?”

    종교생활이든 인문도서를 통해서든 묵상의 자세가 꼭 필요하다. 쿠션이 두꺼운 사람은 어떤 절망적 상황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삶 속에서 ‘자극과 반응 사이’ 마음 쿠션을 좀 더 폭신하게 준비해야 한다. 낙엽이 무르익어 가는 이 계절에 사람과 사람 사이, 따뜻함이 더욱 간절해진다.

    천융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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