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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인연의 향기- 하순희(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14-09-05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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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늘한 바람이 창문을 닫게 한다. 가을이 오는 소리가 저만치 들려온다. 지난여름 두고 온 어느 산사의 들꽃은 지금쯤 목을 쭉 빼고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많은 시간 동안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함께 배웠다. 다음 생에 직업을 가지라면 다시 글을 쓰며 가르침과 배움을 함께하는 이 길을 가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다. 어렵고 힘든 때가 많아도 바람직한 변화와 성장이 주는 보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쁨이었다.

    불가의 인연론에 의하면 1000겁은 한 나라에 태어나고 2000겁은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며 3000겁은 하룻밤을 한 집에서 자며 4000겁은 한 민족으로 만나고 5000겁은 한 동네에, 6000겁은 하룻밤을 같이 자고 7000겁은 부부의 인연이며 8000겁은 부모와 자식으로 만나고 9000겁은 형제자매로 만나고 1만겁의 인연이 있어야 스승과 제자로 만나게 된다고 한다.

    지난봄, 세월호의 슬픔 속에 젖어 있을 때 33년의 시간을 건너 동창회에 은사님들을 초대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런 때 모임을 뒤로 미룰까 하다가 경건한 분위기 속에 다 같이 만나 그 옛날의 추억을 되새기며, 모처럼 몇 년 만에 연락이 닿은 은사님 여섯 분을 모시기로 했다고 꼭 나와 주시라는 부탁의 말을 남겼다.

    6학년이었던 제자들은 한 세대가 지난 동안 사회 곳곳에서 어엿하게 자리잡아 제 몫을 다하고 있어 든든했다. 해 준 것도 없는데 수소문해 잊지 않고 찾아준 것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인 요즘, 3D업종이 된 날들의 힘든 일들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함께 늙어간다며 지금도 카톡으로, 문자로 소식을 전해오는 아이들을 보며 보람에 젖는다. 인생은 100세 시대라며 오래도록 선생님을 만나고 함께 뵙고 싶다는 애교에 슬쩍 기대어 고맙고 행복하다고 답을 보냈다.

    살면서 가슴에 좋은 스승을 품고 사는 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석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내게도 잊지 못할 가르침을 주신 몇 분의 은사님이 계신다. 인생의 길을 가면서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고 산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가끔은 얼굴 뵈어야지 하면서도 마음뿐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다. 육신을 주시고 정신을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좋은 스승은 영혼을 채워주고 마음을 열어 이끌어주시는 선각자이셨다.

    2004년에 함안 아라초등학교 1학년 33명의 인연들은 지금은 고 1이 돼 각자의 학업에 매진 중일 것이다. 내년 3월 1일 학교 교정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소식을 주고받은 제자도 있지만 통 만나지 못한 아이들이 더 많다. 그들이 이 약속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 얼마나 만나질지, 설레는 마음으로 가을의 알곡들이 익어가듯이 기다림을 숙성시켜 가는 계절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만나는 인연들에게 각자의 향기를 각인시킨다. 마음의 창고를 열어 생각하면 웃음이 떠오르고 다시 보고 싶어지는 인연이 더 많다면 행복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연을 지으며 수많은 원을 그리며 지나왔다. 그때마다 나는 무슨 향기로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을까.

    하순희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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