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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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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당신의 난중일기- 김이듬(시인)

  • 기사입력 : 2014-08-2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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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행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명량’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순신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불과 12척의 배로 300척이 넘어서는 적의 배를 일망타진한 명량해전은 실로 믿기 어려운 역사적 전투이다.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이 영웅적인 활약을 벌일 때 조선 방방곡곡 전쟁터가 아닌 곳이 없었을 것이다. 의령에는 청강홍의장군 곽재우가 있었다. 그가 의병을 일으켜 싸운 거름강 전투, 왜병들이 정암진을 건너지 못하도록 신출귀몰한 전술과 전략을 동원해 싸웠던 공적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더 나아가 우리는 안다. 이 모든 전투의 현장에는 백성의 피가 근간이었음을. 장군도 장수도 영웅도 아닌 보통의 존재들이 목숨 걸고 싸웠다는 진실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작은 어선으로 적의 배와 싸우고 이불을 뜯어 깃발을 만들며 솥뚜껑으로 왜병의 총알을 막았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엊그제 나는 의령 충익사에 갔다. 사당에 들러 참배한 후 사무실에서 청강문학상 예심을 보았다. 근 사백 명이 투고한 시 원고 삼천여 편을 다른 평론가와 나누어 읽어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날이 저문 후까지 온정신을 몰두해 가려보았던 작품들에는 멍든 가슴, 치욕의 고통, 아르바이트의 어려움, 병든 부모에 대한 애끓음, 퇴직 이후의 삶 등 일상적 아픔에서부터 사회와 국가의 복잡하고 험난한 문제와 직면하는 주제의식도 있었다. 세월호를 모티프로 쓴 작품도 많았다. 투고자의 이름과 주소, 약력 등이 일체 제거된 원고를 전달받았으나 작품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연령대는 20대 초반부터 70대 이후 노인에 이르렀고 예상 외로 중장년층의 작품으로 보이는 시편들이 유독 많았다.

    몇 해 전부터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문학의 역할, 시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곧바로 시대의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무기력한 문학예술이 무슨 소용이냐는 반발과 비판으로 직결되었고 문학의 위기, 시에 대한 혐오로 표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를 읽고 쓰는 인구는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한 조사에 의하면 IMF 이후에 오히려 시를 쓰고 투고하는 문청들의 숫자가 늘었다고 한다. 평탄한 인생길에서 보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고통 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민족의 한을 풀고 가신 이의 숭고한 뜻을 받드는 대서사시를 쓰는 일도 의미 있고,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대작도 중요하다. 하지만 문학의 꽃은 작고 작은 씨앗에서 발현한다. 당신이 참았다가 흘리는 눈물 한 방울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 당신의 맺힌 마음이 시 한 줄 짓는 순간 풀려나갈 것이다. 거기에는 통찰력보다 마음이 필요하고 창작의 통증이 따를 것이다. 고통을 일부러 선택할 용기도 필요하다. 시를 짓는 일이 국가의 대개혁을 불러오지 못한다 해도 자기 자신의 작은 혁명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말하고 싶다. 다만 영웅이나 장군,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지혜로운 자가 이 시대를 바꾸는 것일까? 우리는 도래하지 않는 그들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은가? 무리가 따르는 비약을 하게 되는 아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베스트셀러 작가, 유명 시인 등이 문학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바로 당신의 환란, 전쟁 같은 나날, 불운의 순간을 써보자. 거기에 시가 있다. 당신만의 난중일기를 써라.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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