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6일 (화)
전체메뉴

[작가칼럼] 시인의 피- 이제니(시인)

  • 기사입력 : 2014-06-27 11:00:00
  •   
  • 메인이미지


     
    열 살 무렵에 썼던 시를 기억한다. 기르던 개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텅 빈 개집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없는 개의 자리가 몹시도 컸다. 개집만큼의 어둠이 뭉글뭉글 자라나더니 조금씩 조금씩 마당을 뒤덮고 머나먼 저 우주 끝까지 번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개의 이름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공책에다 적는 것뿐이었다. 개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그 길고도 긴 시는 개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제 개의 얼굴은 흐릿해졌지만 그때의 문장은 그때의 눈물만큼이나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개가 있었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무엇. 나아가 그 현실을 압도하며 자라나는 그 무엇. 시적 마법의 순간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현실을 넘어 현실 그 너머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보고서도 보지 못했던 시간과 공간의 틈바구니를 살짝 열어보여 주는 것.

    시의 문장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는 독자의 편지를 받을 때가 있다. 특정한 의미와 의도를 가지고 써내려 가긴 했지만, 딱 부러지게 한마디로 “이건 이런 뜻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시는 분석되어서도 안 되고 분석될 수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집의 뒤쪽에 붙어 있는 두툼한 해설 역시 그 시집을 읽어내는 여러 독법 중의 하나로 여기면 족하다.

    웹 사이트에서 부분 부분 발췌된 채로 떠돌아다니는, 특히나 140자 안에 구겨 넣듯 짧게 짧게 잘려진 채로 읽히고 있는 트위터 속의 시의 파편들을 볼 때마다 시가 소비되고 있는 요즘의 방식을 그대로 보는 듯해서 마음이 슬프다. 한 편의 유기적인 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언어가 끌고 가는 미지의 길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명료한 깨달음의 문장, 혹은 현자의 잠언처럼 읽히며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 물론 좋은 시는 몇 줄의 짧은 문장만으로도 삶의 비의를 드러내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깊이와 높이를 품고 있다. 그러나 시는 잠언이 아니다.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장르는 더더욱 아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장 콕토는 은유의 힘과 예술 그리고 꿈 사이의 관계를 고찰한 그의 영화 <시인의 피>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인은 심장의 붉은 피뿐만 아니라 그들 영혼의 흰 피도 흘린다.’

    어느 때보다도 시인이 넘쳐나는 시절이다. 시를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그나마 시를 읽는 사람들도 시를 쓰고 있거나 시를 쓰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누구도 읽지 않는 시를 목숨 걸고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일은 또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오랜 습작기간에도 불구하고 등단을 못해 괴로워하는 문우는 어떻게 하면 시인이 될 수 있느냐고 묻고 묻는다. 감히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지나간 나의 시가 현재의 나의 시를 가르쳐줄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멀고도 가까운 저 너머의 저것을 가져와 써내려가지만 결국 저것에 가까운 이것밖에는 되지 않는 오늘의 시를 보면서. 저것 너머의 그것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려고. 나 역시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쓸 뿐이다. 그저 갈 뿐이다. 더 이상 내 자신에게 나는 어떤 시인인가를 묻지 않을 때까지. 더 이상 울지 않을 때까지.

    이제니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