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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환등기 앞에서 꿈을 꾸던 ‘어린이’- 차민기(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4-03-2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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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년, 어느 미술가로부터 환등기 한 대를 선물 받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무성영화의 변사 흉내를 내며 빛과 그림자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훗날 이 아이는 우리나라 아이들의 꿈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칠 것을 다짐한다. 이 땅에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아로새긴 소파 방정환의 이야기다.

    방정환의 집안은 부친의 사업 실패로 인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선물 받은 환등기는 가난한 삶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꿈이었다. 그렇게 환등기 앞에서 빛과 그림자의 세계에 빠져 살던 방정환은 천도교인이 된 아버지의 영향으로 천도교 소년단체인 ‘소년입지회’에 가입하게 됐고,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동화구연과 토론회 등을 경험하면서 아동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집안 어른들은 그가 선린상고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으나, 환등기의 빛그림자에 빠져 지냈던 그는 이미 현실 너머의 환상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은행 서기로 취직시켜 주겠다는 선생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졸업 1년을 앞둔 시점에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만다.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인생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 그는 손병희의 후원으로 ‘보성전문학교(법과)’에서 공부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로 방정환은 ‘북극성’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재능과 꿈을 키워나갔다. 1919년 12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잡지 ‘녹성(綠星)’을 발행했던 것도 어린 시절, 환등기를 가지고 놀던 때의 꿈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가난 때문에 꿈을 잃거나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된다는 생각을 더욱 굳건하게 다듬어 나갔다. 1920년에는 ‘개벽’의 도쿄 특파원으로 임명됐는데, 그때 도요(東洋)대학 철학과에 특별청강생으로 다니며 철학과 아동문학, 아동심리학과 문화학 등을 공부했다.

    공부를 마친 방정환이 본격적으로 아동문학에 힘을 쏟게 된 것은 1923년의 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가 창간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로부터 1931년 7월,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동화 집필과 구연동화에 몰두했으며, 죽는 순간엔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후 일제의 드세진 강압과 6·25전쟁 때문에 ‘어린이’는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었다가 196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어린이’와 그 용어를 처음 만든 방정환에 대한 인식이 다시 확산되기 시작했다.

    ‘어린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4~5세부터 초등학교까지의 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부르는 말’로 올라 있다. 그러나 이 땅의 어린이들은 그리 대접받을 만한 처지에 놓여 있지 못하다. 거대한 자본주의의 틀 속에 갇힌 젊은 부모들은 자본 획득을 위한 쳇바퀴 위에서 바쁘기만 하고, 부모 품에서 놓여난 아이들은 남의 손에 이리저리 내돌리며 어릴 때부터 경쟁과 눈치의 사람관계를 배울 뿐이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에게 꿈을 물으면, ‘돈’이라는 단말마 같은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누가 어린이를 ‘미래의 꿈’이라 했던가. 1920년에 처음 방정환이 ‘어린이’라는 이름을 만들 때, 그 이름 안에 배어 있던 무수한 꿈들을 결국 기성세대들이 다 망가뜨려버린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올해 창원에서 제3차 세계아동문학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창원시는 ‘아동문학의 수도 창원’을 내걸어 이 축제가 문화, 예술 전반의 동반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앞에 ‘어린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땅의 많은 공모전이 참가자들의 스펙쌓기로 전락하고 만 시점에서, 국내 최대의 아동문학축제마저도 어린이들의 경쟁을 부추기는 쪽으로 흘러버려선 안 될 일이다. 어린이들이 문학을 통해 스스로의 꿈을 키우고 그 꿈을 실현시켜 갈 수 있도록 지혜로운 이들이 순수한 마음을 모을 일이다.

    차민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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