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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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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작가로 산다는 것- 김문주(아동문학가)

  • 기사입력 : 2014-01-2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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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에 갔어야 했다. 굳이 봄이 아니라도 겨울은 피했어야 했다.

    시골의 구석진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돌담을 따라 굽이진 길을 오를 때만 해도 겨울 외출의 낭만에 젖어 있었다. 예전부터 오고 싶었던,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가 살았던 곳이다. 그분이 살았던 생에 대해 알고 있었고, 사진을 통해 마음은 이미 몇 번을 다녀온 터였다.

    들판의 마른 풀들이 흙빛으로 몸을 누인 시간, 대문은커녕 경계를 알리는 흔적도 없이 홀연히 나타난 흙집 한 채. 집을 돌아 나온 바람이 메마른 나뭇가지를 툭 건드리는 순간, 내 가슴속에서 외로움이 출렁거렸다.

    문은 잠겨 있었고 겨울을 견디느라 창호지는 시린 빛이다. 찢긴 문풍지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깊고 아득한 흙빛. 방 오른쪽에는 개수대로 보이는 것이 서 있고, 작은 상 위에는 권정생 선생님의 사진이 앉아 있고 그 앞에 선생님이 쓰신 책들이 놓여 있었다. 맨 왼쪽 책이 ‘몽실언니’였다. 고독으로 흙벽을 받친 작가의 방이었다. 가난을 운명이라 여기며 글을 쓰는 게 전부였던, 선생님의 영혼이 아직도 머물러 있을 것 같은 방이었다.

    입술을 깨물었지만 바람에 밀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흙벽 깊숙이 세상의 끝이 있을 듯했다. 작가의 삶은 고독하다. 현실에 무감각하고 그저 작품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외로움은 떨쳐 버리고, 다른 사람의 고독마저 사랑해야 하는 삶이다. 그것이 발가벗은 겨울나무보다 더 살 시린 일상이라는 걸 나는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나는 간혹 나만의 작업실을 꿈꾸었다. 남의 눈에서 벗어나 내 영혼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시골 한구석에 나만의 공간을 꿈꾸었다. 세상 걱정 없이 글만 열심히 쓰면서 생을 보내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작가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유치하고 안일한 발상이었던가. 나는 권정생 선생님의 집에서 깨달았다. 나태하게 마치 ‘여행’과도 같은 도피적인 글을 쓰려고 했던 나의 꿈. 생생한 삶의 공간에서 작가로서 사명을 가지고 제대로 된 작품을 갈망하지 않으면 거품 같은 인생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계속 흘렀다.

    나는 권정생 선생님의 삶이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외롭고 소박한 삶을 사셨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한 생을 사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삶은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로 보였다.

    그런데 이곳은 아직 흙빛이었다. 불행보다 더 깊은 슬픔. 자연이 생생한 빛깔을 다 보여주고 난 끝자락, 주검을 닮은 빛이었다. 이 속에서 동심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많은 것이 불투명해지는 느낌이다. 선생님은 평생 가난하게 살며 지병까지 거느리고 동심을 지키는 인생을 살았다. 나는 언제 작품만 생각하며 세속적인 가치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나는 눈물을 다 훔쳐내고 다시 집을 돌아보았다. 흙벽의 네 귀퉁이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선생을 느껴보려고 했다. 봄이면 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다. 그랬다. 나도 지금 아직 어린 겨울을 나느라 이리 슬픈 것인지도 몰랐다. 다시 찢긴 창호지 틈으로 선생님 사진을 바라보았다. 수척하지만 평온한 표정의 선생님이 웃으며 생을 걸고 제대로 된 글을 쓰라고 하셨다.

    선뜻 답은 드릴 수가 없었다. 내 가슴에 돋는 생각들이 감상인지 새로운 열정인지 결론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다만 작가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누리면서 제대로 된 글을 쓸 수는 없다. 어떤 이는 말할지 모른다. 작가라고 꼭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느냐고. 작가라고 꼭 가난하게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궁핍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초연할 수 있어야 작품다운 작품 한 편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감히 나도 언젠가는 작가로만 살고 싶다.

    김문주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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