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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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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21) 통영 욕지 연화도 용머리

출렁 파도가 칠 때마다
꿈틀 움직이는 푸른 용

  • 기사입력 : 2013-06-2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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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영 바다 위에 핀 한 송이 연꽃 ‘연화도(蓮花島)’.

    연화도는 통영시 욕지면에 속한 섬으로 통영항에서 뱃길로 1시간 거리다. 통영항에서 남쪽으로 약 23㎞(직선거리), 욕지도에서 동쪽으로 7㎞ 지점 바다 위에 연꽃처럼 떠 있으며 면적은 3.4㎢이다.

    연화도에는 통영 8경의 하나로 거대한 용(龍)이 등천(登天)하는 형상인 용머리가 있다. 용머리는 연화도 최고봉인 해발 212.2m의 연화봉에서 조망해야 제격이다.

    역동적으로 굽이치는 몸체와 쭈뼛쭈뼛 솟은 등비늘이 물안개의 흐름을 따라 꿈틀꿈틀 용틀임을 하며 금방이라도 몸을 솟구쳐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다. 동머리 혹은 네 바위섬을 포함한 용머리의 형태는 금강산의 만물상을 연상시킬 정도로 장관이다.

    일몰 직전에 찾으면 더욱 비경이고 지는 해의 빛을 받아 황금으로 물드는 바위가 장관이다. 연화도의 용머리는 동(動)과 정(靜)의 두 얼굴을 지닌 천하의 비경이라 할 만하다.

    용머리의 웅장하고 아름다움 모습을 더 보려면 배를 타고 용머리 남쪽 해안 10여 리를 운항하면서 수십 길 바위 벼랑에서 억겁을 두고 비바람에 깎이고 파도에 쪼인 만물상(萬物相)의 황홀한 자태를 바다에 넌지시 비춰보아야 한다.

    과거에는 네 바위 끝섬 장도바위 틈 속에 낙락고송 한 그루가 고고하게 서 있었다. 주민들에게 ‘천년송’으로 불렸던 이 소나무의 수령은 100년으로, 곧게 솟은 바위와 수평으로 가지를 뻗어 경이감을 자아내며 큰 사랑을 받아 왔지만 지난 2003년 태풍 매미 내습 이후 잎이 붉게 말라 다시는 그 신비한 자태를 보지 못하게 됐다.

    용머리 일대는 남해 제일의 바다 낚시터로 유명하다. 불자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연화도에서의 낚시가 달갑지 않겠지만 낚시객들은 찌릿찌릿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볼락어, 감성돔을 위시해 도미, 농어, 삼치, 광어, 돌돔 등 고급 어종이 사철 풍성해 연중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는 볼락철이었지만 지금부터는 참돔(도미) 계절이 왔다.

    연화봉에서 용머리를 조망한 후 시선을 사방으로 둘러보면 가슴이 말끔히 씻기는 듯 시원하고 아주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초여름의 물안개라도 피는 날이면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점점이 떠 있는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둥실둥실 떠 있는 듯한 환상에 빠진다. 욕지도의 천황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갈매기 섬 홍도, 갯바위 낚시의 명소 좌사리도, 한산면 매물도와 죽도, 저 멀리 국도와 세존도가 보일락 말락한다. 맑은 날에는 일본 대마도가 선명하게 바라보여 흥취를 돋워 주기에 손색이 없다.

    연화도는 통영시 43개 유인도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이 살았다. 욕지도 등 다른 섬에는 조선왕조의 ‘공도(空島) 정책’에 따라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이곳은 120여 년 전 통영시 도산면 수월리에서 김해 김씨 성을 가진 부부가 흉년을 견디다 못해 뗏목을 타고 와 정착했다. 지금은 본촌마을, 십릿골, 동두마을 등 세 마을에 105가구의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연화도의 본촌(本村) 마을과 이마를 맞대고 소처럼 누워 있는 섬 ‘우도(牛島)’에는 천연기념물 제344호로 지정된 생달나무 세 그루와 후박나무 한 그루가 있고 희귀한 백동백나무도 몇 그루 있다.

    연화도는 이름이 예시하는 바와 같이 불교와 인연이 깊은 섬이다. 조선 연산군 시대인 1496년 폭정과 억불정책을 피해 서울 삼각산에서 이 섬으로 은거한 연화도인이 실리암을 지어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원불(願佛)로 모시고 평생을 수도하다가 열반에 들면서 “내 생에 다시 와서 정진하겠노라” 하는 표적을 바위에 새겨 놓고 좌화(坐化)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연화도인이 열반한 봉우리를 연화봉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이 섬도 연화도라 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에 승병장으로 유명했던 사명대사가 바로 이 연화도인의 환생이라고 한다.

    지금 연화봉에는 산신당이 있고 바로 옆에 조그만 바위굴이 하나 있어 이 근처가 옛 실리암의 터가 아닌가 하나 확인은 안 된다.

    산신당에 모셔 놓은 신물(神物)은 높이 한 자 반쯤 되는 타원형의 돌이다.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마을에서 가장 덕이 높고 존경받는 사람이 제주가 되어 산신당(서낭당)에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새벽 해가 떠오를 때까지 주민들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를 지내오고 있다.

    토굴과 반석, 서낭당은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 반석에는 부, 길, 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연화도인이 자기에게 은둔처를 준 자연에게 감사하고 자기를 도와준 섬 사람에게 은혜의 뜻으로 이 글을 손가락으로 썼다고 한다. 토굴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신기하게 지하수가 나오고 있으며 경관 또한 아주 뛰어나다. 그 후 약 70년이 지난 후 사명대사가 또다시 비구니 스님 세 분과 함께 이곳 연화도에서 수행을 했다니 기막힌 인연의 섬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이 임박했을 때 사명대사는 육지로 나왔으나 보운, 보련, 보월 세 명의 비구니 스님은 연화도에 그대로 남아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순신 장군을 도와 해전 현장을 따라다니며 천풍기상법, 해상지리법을 알려주고 거북선 건조법을 알려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가사를 걸치고 바다에서 신출귀몰하면서 왜군을 무찌르는 것이 마치 붉은 구름이 피어나는 것 같다 하여 이들을 자운선사(紫雲禪師)라 불렀다 한다.

    연화봉에서 내려오면 우측 길에는 병자들의 병을 고쳐준다는 보덕암이 있고, 좌측 길에는 지난해에 준공한 출렁다리로 향하는 등산길이 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보덕암은 앞에서 보기에는 1층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5층임을 알게 된다. 이곳의 운치는 방에서 홀로 앉아 창문을 통해 내다보는 밤바다의 풍광이다. 교교한 달빛이 바다에 반사되어 창문을 두드리고 개똥벌레처럼 유영하는 고기잡이 배들의 불빛이 장관이다. 암자 동쪽에는 해수관음상이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기잡이배들과 선원들의 무사안녕을 바라면서 먼 바다를 보고 서 있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는 1998년에 건립된 연화사가 있다. 이 절로 불교 신자들의 발길이 늘어났고 연화도가 더욱 알려졌다. 대웅전의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불과 좌우협시불,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 창건 공덕비, 8각9층탑도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도미와 고등어회를 별미로 먹고 통영으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요객선 요금은 8300원이며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세 번씩 왕복한다.

    글= 신정철 기자·사진= 이강석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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