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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51) 송창우 시인이 찾은 창녕 우포늪

찰칵, 내 가슴에 들어온 진초록 세상

  • 기사입력 : 2013-06-2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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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포늪 풍경.


    목포제방 수문에서 본 나무갯벌.


    이마배를 저어가는 주영학 씨.


    우포늪 노랑어리 연꽃.


    우포늪 왜가리.
     


    우리 집 거실에는 늪의 초여름 풍경을 담은, 제법 규모 있는 사진 액자 하나가 걸려 있다. 갈숲과 갈숲 사이를 뒤덮은 진초록 개구리밥을 밀며 장대를 저어오는 조그만 배가 있는 풍경. 배의 앞쪽엔 어머니가 앉고, 가운데엔 보따리 하나를 얹고, 건장한 아들은 뒤쪽에 서서 긴 장대로 배를 밀고 온다. 배가 지나온 길은 맑은 하늘빛이다. 만약 이 풍경 앞에 실제로 서 있었다면 하늘빛 길을 지우며 다시 물 위를 서서히 뒤덮고 있는 개구리밥의 위력을 보게 될 테지만, 거실 속의 사진에선 하늘빛 길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 사진은 십수 년 전 지역에서 활동하던 어느 사진작가가 선물로 준 것이다. 처음엔 내가 운영하고 있던 조그만 카페의 벽에 잠시 장식이나 하자며 걸어둔 것이었는데, 이 풍경을 하도 탐내니까 선뜻 내어준 것이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늘 눈이 머무는 곳에 걸려 있게 된 사진. 나는 사진 속의 풍경이 우포늪이라는 건 알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찍은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작가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지만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역시 모른다. 당시에도 재가불자를 자처했으니 어쩌면 지금쯤 스님으로 살고 있지는 않을까 짐작만 할 뿐. 요즘 같은 세상에 연락처를 수소문하면 하루 안에도 알 일이지만 나는 그냥 모른 척 산다. 아무튼 그렇게 사람은 사라지고 어느 날 그가 우포늪에서 보았던 풍경만 남았다.

    나무갯벌 근처였을 것으로 짐작은 하지만, 여러 번 가봤어도 같은 풍경을 본 일은 없다. 하기야 아침 저녁에도 달라지는 것이 늪의 풍경인데, 비슷하긴 해도 꼭 같은 풍경은 없으리라. 아무튼 나는 우포늪의 초여름을 그렇게 만났다. 그리고 며칠 전 개구리밥이 꼭 사진 속의 풍경처럼 진초록으로 변해 가는 날에 우포늪에 갔다.

    이번 여행길엔 우포늪 환경지킴이로 이름난 주영학 씨가 동행했다. 그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타고 온 오토바이 때문에 한눈에 알아봤다. 앞쪽엔 낚시 금지라고 쓴 큼직한 글씨가 붙어 있고, 뒤쪽엔 붉은 짐통을 중심으로 경고등과 한 자루의 삽과 낡은 밀짚모자와 헬멧을 꽁꽁 동여매 놓은 100㏄ 오토바이. 그는 날마다 이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우포늪 구석구석을 누비며 쓰레기를 치우고 뉴트리아를 잡는다.

    대대제방을 지나자 토평천이 나온다. 토평천은 우포늪의 탯줄이다. 화왕산에서 발원한 토평천 물줄기는 대대제방이 있는 쪽에서 우포늪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토평천은 쪽지벌을 지나 다시 낙동강으로 이어지는데, 우포늪의 땅높이가 낙동강의 만수위보다 낮아서 홍수 때엔 낙동강이 역류해 들어온다. 대대제방 쪽으로 흘러오는 토평천이 우포늪을 만든 탯줄이라면 쪽지벌 쪽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물길은 우포늪을 흠뻑 적시는 젖줄이다.

    우포늪의 탯줄이 있는 곳에 그의 탯줄도 있다. 갈숲과 갈숲 사이 작은 둠벙들을 만들며 흘러오는 물길을 따라 옛날의 추억도 흘러온다. 어머니의 빨래터가 있었고, 물 속에 흔들리는 푸른 말을 끊어서 나물을 무쳐먹던, 가난했지만 맛있는 날들이 흘러온다. 말은 꼭 바닷속에 사는 잘피를 닮았다. 말나물은 먹어보지 못했지만, 내게도 달큰짭조름한 잘피 뿌리를 씹어 먹던 추억이 있다. 말잎 하나를 꼭꼭 씹어본다. 우포늪의 말 맛은 풋풋하고 담백하다.

    그렇게 말을 맛보는데 그가 조용히 물가를 가리킨다. 팔뚝만 한 잉어 한 마리가 물가에서 대가리를 쑥 내민다. 잉어가 반갑다고 인사를 하러 온 것이라 했다. 저만치 나뭇가지 위에 왜가리 한 마리도 내려앉는다. 물길을 따라 물닭 울음소리도 흘러온다. 노랑어리연꽃들도 한창 꽃을 피운다. 그는 우포늪이 이리 길손을 환영하는 일은 잘 없는 일이라 웃으며 말했지만, 아마도 그들과 오랫동안 마음을 나누어온 사람과 함께 있은 까닭이리라.

    그는 고향을 떠나 대구의 양은그릇 공장에서 일을 하다 IMF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정식 직함은 낙동강유역환경청 소속 우포늪 환경감시원이다. 어느덧 이 일을 한 지도 열 몇 해쯤 되었는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란다. 하긴 그리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그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우포늪을 얘기할 때마다 조금씩 높아지고 밝아지는 목소리를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가슴속엔 우포늪이 통째로 들어 있는 듯했는데 잉어를 만나면 잉어처럼 물풀 속을 헤엄쳐 다니는 얘기가 있고, 물버들을 만나면 물버들처럼 흔들리는 얘기가 있었다.

    토평천을 떠나 사지포 제방으로 향했다. 제방을 사이에 두고 우포와 사지포가 나뉘어 있다. 우포를 동네 사람들이 소벌이라 부르는 것처럼 사지포는 모래늪벌이라 부른다. 사지포라는 한자말이 지닌 딱딱한 느낌보다야 모래늪벌이라는 우리말 이름이 훨씬 쉽고 정겹고 좋다. 그건 소벌이나 나무갯벌도 마찬가지다.

    모래늪벌에 흰 그림자를 환히 비추며 한창 먹이를 찾고 있는 몇 마리 왜가리가 있는 풍경이 참으로 평화롭다. 모래늪벌 기슭에 선 버드나무 아래서 이제는 거의 끝물일 찔레꽃 향기가 바람결을 타고 온다. 그는 푸른 습지와 하늘빛 물이 빛나는 광활한 우포늪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자를 따서 지었다는 삼행시를 읽는다.

    주: 주인 손님 가릴 것 있나 / 영: 영혼을 모두어 갈 대자연인데 / 학: 학처럼 우포늪을 놀리라

    이름자에 학자가 들어 있다는 것이 새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렇게 바람도 쐬고 시도 읊어보다가 소목마을 나루터로 향했다. 소목마을 나루터에는 우리 집 거실 사진 속에 있는 작은 쪽배가 몇 척 물가에 올려져 있었는데 배의 앞쪽과 뒤쪽이 다 이마처럼 반듯해서 이마배로 부른다. 그는 앞자리에 나를 태우고 긴 장대로 이마배를 밀며 늪 속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갔다. 수면에는 마름모꼴의 마름잎과 생이가래, 개구리밥이 떠 있고 물 속에는 가느다란 붕어마름 줄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군데군데에 아직은 작은 가시연들도 잎사귀를 띄워놓고 있었다. 여름이 깊어지면 가시연은 엄청난 크기로 자라며 푸른 갑옷처럼 수면 위를 덮을 것이다. 갑옷을 찢고 나온 붉은 꽃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늪의 가운데 있는 푸른 똥섬에 설치한 뉴트리아 덫을 보러 간 길이었다. 뉴트리아는 일명 괴물쥐라고 불리는 외래종의 반수생 설치류다. 괴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덩치도 크고, 번식력이 좋고, 먹이도 많이 먹어서 생태교란종으로 악명이 높다. 우포늪도 뉴트리아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의 주된 임무는 뉴트리아를 잡는 것인데, 몇 년 동안 잡은 것이 600마리가 넘는다 했다. 그런 노력이 있어 지금은 개체수가 좀 줄었다는데, 아무튼 덫에 뉴트리아가 걸려 있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이었다.

    그도 그랬다. 우포늪을 위해서 뉴트리아를 잡아냈지만, 생명이 사라져가는 것이 좋을 리가 있으랴. 나는 ‘우포늪에서 사라져간 동식물 영혼을 위한 기원제’에서 두 손을 모으고 절을 올리고 있는 그의 사진을 본 일이 있다. 죄가 있다면 뉴트리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피와 고기를 목적으로 들여온 인간의 헛된 욕망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나무갯벌이다. 제방의 한쪽 아래쪽으로 나 있는 좁다란 수문을 통과해서 이마배를 저어갔는데, 어두운 수문 속에서 보이는 나무갯벌의 빛나는 풍경은 참으로 밝고 빛났다. 천국으로 가는 문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풍경이지 싶다. 나무갯벌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특히 아침에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의 몽환적인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라는데, 아마도 내가 다시 우포늪을 찾아오는 날은 물안개 피는 어느 새벽이리라.

    그는 왕버들 그늘이 물 속에 내려앉은 나무갯벌을 한 바퀴 돌아주고, 기러기와 고니가 초식새라는 것을 일러주며, 왜가리에게 무어라 작별의 인사를 하고, 이마배에 앉아 물장난을 잠시 치다가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붕 우포늪으로 사라졌다. 불현듯 내게 우포늪 사진 하나를 건네준 사람이 그립고, 미루나무 꼭대기에 낮달 하나가 걸리던 날.

    글·사진=송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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