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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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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꽃, 그리고 담배- 김진엽(시인)

  • 기사입력 : 2013-04-1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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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이 왔다. 전쟁이 뭔지 몰라도 될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총칼보다 더 무서운 것을 겨누고 있는 이 강산에 봄이 왔다. 강원도 산간에 간간이 들려오는 눈 소식 사이로 찾아온 4월, 동네마다 꽃 잔치가 한창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이 소생하면서 세상은 다시 활력이 넘친다. 이즈음 내가 늘 찾아드는 구(舊)공설 운동장, 아무도 없는 빈 운동장 둘레에 가득 핀 벚꽃을 보러왔다. 홀로 마시는 차가 으뜸이라더니 꽃구경도 혼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우두커니 서서 활짝 핀 벚꽃을 치어다본다. 분홍도 천 가지 분홍, 만 가지 분홍이 있구나. 한 꼭지에 피었으나 제각각인 꽃들을 넋 놓고 바라보다 문득, 이 꽃은 마냥 좋아라고 바라보기엔 어쩐지 맘이 편치 않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장영희 교수가 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 보면 조이스 킬머라는 시인이 ‘나무’라는 시에서 ‘시는 나 같은 바보가 만들지만/나무는 오직 하느님만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노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무 자체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면서 저 벚나무를 하나의 식물로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늘 약간 언짢고 불편해하면서 올해도 여전히 벚나무 아래를 서성이고 있는 나….

    2003년 5월 30일부터 화장품가게 한 귀퉁이에 느닷없이 담배를 팔게 되었다. 옆집 할머니가 나에게 가게를 팔고 가면서 당신이 몇십 년 해오시던 담배점포까지 넘겨 주신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담배 종류를 몰랐으나 조금 익숙해지면서 마일드세븐이라는 담배가 일본 담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자꾸만 속에서 불끈불끈 치솟는 것이 있었다.

    가게를 온통 빚으로 샀으니 그 이자가 얼마며, 남편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산재환자가 되어 병원치료 중이었고 아이들은 둘 다 대학생이었다. 그야말로 한 푼이 새롭고 아쉬워 365일 쉬지 않고 일을 하며 살아도 헉헉대는 뻔한 살림살이었지만 그때부터 지금껏 마일드세븐만큼은 팔지 않고 있다. 나 하나 이런다고 무슨 영향이야 있을까만 절대 후회하진 않는다. 담당자가 처음 2~3년 동안에는 잊을 만하면 가끔씩 찾아와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느냐며 묻곤 하더니 그 뒤로는 포기했는지 통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활짝 핀 이 벚꽃과 마일드세븐이라는 담배와 불안한 북녘 소식은 꼭 그만큼씩 불편해라, 언짢아라,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여 걷는 사이 어느새 벚꽃으로 뒤덮인 운동장을 얼추 한 바퀴 휘돌았다.

    바람이 분다. 벌과 나비의 날갯짓을 도와주려고 바람이 분다.

    저 꽃이 불편하다. 4월 아침, 약간 불온한 내 마음이 벚꽃에게는 미안해서 고개를 한껏 젖혀들고 지그시 올려다보며 겸연쩍게 웃는다. 벚꽃 사이로 보이는 아파트촌에 오래된 주택을 지키며 사는 우리 가게 단골언니가 다가왔다.

    “꽃구경 나왔나, 가게는 우짜고?”

    “예-가야지요.” 꾸벅 인사를 드리고 타박타박 돌아서 나오는 나를 제비꽃이 불러 세운다.

    오늘 아침손님들은 이왕에 다 놓쳤으니 그래볼까 하며 쪼그려 앉아 이윽히 내려다보며 지난겨울, 그 혹한을 어떻게 견디었더냐고 물었더니 추우면 추울수록 봄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다며 머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주 작고 가느다란 벌레 한 마리가 꼬물꼬물 기어가다가 하필 제비꽃을 타고 오른다. 혹한을 견딘 것들은 참 대단하고 아름답다.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워도 활짝 피어나는 꽃이 하도 고마워서 오늘 아침만큼은 저 꽃의 상징 따위 잠시 잊어도 되지 않을까.

    김진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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