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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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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78) 황강 26 가야산 해인사 정료대~장경판전

해인사 유물마다 선조들 숨결과 부처의 세계 깃들고…

  • 기사입력 : 2012-12-1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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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만대장경판과 그 밖의 경판들을 간직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
    장경판전 담장.
    일각문.
    대적광전.
    정료대.
    대적광전 계단의 마구리 무늬.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선거와 경남도지사 보궐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대표는 민주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고 하며 국민들이 주요 사항에 직접 참여하여 결정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오늘날의 국가에서는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이 한곳에 모여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직접 민주정치를 실시했던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는 성인 남자 시민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국가가 발전하면서 주요 결정 사항의 내용도 복잡해지고 전문화됐기 때문에 전문가가 필요해졌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표자를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가 의사 결정을 내리는 대의 민주주의를 실시하게 됐다. 대표를 뽑는 것을 선거라고 한다. 따라서 선거는 축제의 장이 돼야 하고 국민 모두가 행복한 행사가 돼야 한다. 그러나 지역 감정보다 더 지독한 계층 간의 대립이 상존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대통령이나 도지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지 기대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게 생각해 보는 것이 올바른 민주주의 정신이라 여겨진다.


    <해인사 석등·정료대·대적광전>

    찬바람이 부는 산사의 한가한 대적광전 마당에는 삼층석탑 옆에 석등이 1기 서 있다. 해인사 석등은 사찰의 경내를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의 경내를 밝혔다면 화사석에 그을린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남원 실상사 석등은 석등에 계단이 있고 그을린 흔적이 있어 실제 불을 놓아 어둠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 석등은 상징적인 의미로 어둠(무지, 번뇌)를 몰아내는 진리의 광명체임을 더욱 부각시켰다. 마당에서 대적광전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3곳인데 모두 가파르다. 그러나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계단의 폭이나 높이가 건축적 기준을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 계단으로 올라서면 화단에 작은 석조 정료대가 있다. 석등과 비슷하지만 생김새는 화려하지는 않았다. 정료대는 사찰이나 서원 등에서 야간 행사가 있을 때 관솔이나 송진 등을 태워 경내를 밝혔던 것으로 노주석 또는 불우리라고도 한다. 해인사 정료대는 상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올수록 점차 좁아지는 8각 기둥에 상부석은 활짝 핀 연꽃을 바위에 고스란히 담아놓은 듯한 연화문양이 다른 정료대와는 다르게 섬세하면서도 자연스럽다.

    해인사 정료대는 장인의 숨은 재치도 남아 있는데 비례가 맞지 않는 상부석은 제멋대로 빚어진 우리 옛날그릇을 닮은 듯하고, 기둥에 새겨진 다람쥐 조각은 정료대가 불로 뜨거워져 허겁지겁 내려오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새겨 항상 미소가 떠오른다. 대적광전 문을 열면 비로자나불상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정료대는 아마도 부처가 중생을 살피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환히 불을 밝혀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대적광전으로 들어섰다. 대적광전은 해인사의 주불전이다. 대적광전의 의미는 일체의 번뇌를 끊고 지혜를 얻으며 부처가 일체의 산란한 마음을 여의고 드는 선정을 뜻한다. 전각은 주불전을 중심으로 가람이 배치된다.

    그래서 주불전은 언제나 가람의 가장 중요한 당우가 된다. 주불전에 봉안한 불상이 어떤 불상이냐에 따라 그 사찰의 정신적 지주가 결정된다.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창건됐던 해인사는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상이 주불이다. 비로자나는 영원한 법 즉 진리를 상징한다. 대적광전은 해인사 창건 당시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비로전이란 2층 건물로 창건되었으나 해인사의 일곱 차례 대화재로 인하여 비로전도 여섯 차례나 소실되는 수난을 겪었다. 조선 1488년(성종19)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꿨고 현재의 대적광전은 서기 1818년 중건했다. 1971년 앞면 5칸·옆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대폭 중수를 하면서 규모가 더 커져 다른 당우들과 균형이 깨졌다는 느낌이 든다. 대적광전 계단 측면에 태극무늬를 비롯한 독특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비로전·대장경판전>

    가야산 해인사는 2007년 11월 24일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다포형식의 대비로전을 건축하고 대적광전과 법보전의 ‘동형쌍불’인 두 비로자나불상을 나란히 안치했다. 이 쌍둥이 비로자나불상은 2005년 7월 금칠을 하는 과정에서 불상 내부에 먹물로 쓴 ‘대각간’이라는 글자가 나와 통일신라의 유력한 진골 귀족이 833년에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해인사에는 대적광전 이외에 쌍둥이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고 대비로전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비로자나불상을 주불로 봉안한 곳이 대적광전인데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했으나 주불전이 아닌 경우 비로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때로는 화엄전으로 칭하기도 한다.

    비로자나불상은 지권인이라고 하는 수인으로 왼손 집게손가락을 위로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체의 무명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해인사의 중심 불전인 대적광전을 뒤로 돌아들면 고색이 듬뿍 앉은 이중의 긴 축대 한가운데 높고 가파른 돌계단이 막아선다. 스물세단 돌 계단을 올라서면 흰 회벽 위로 담쟁이덩굴이 너울너울 뻗어가는 정감 넘치는 꽃 담장을 반으로 가르며 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만 하나씩 세우고 문짝을 단 일각문이 솟아 있다.

    일각문 상단에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서예가인 해산 박기돈이 쓴 ‘팔만대장경’ 현판이 붙어 있다. 일각문을 넘어서면 넓게 두른 담장 안에 네 채의 건물이 긴 네모꼴 평면을 이루며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공간으로 들어서면 경비원들이 곳곳에 서 있고 관람객의 행동을 살피는 폐쇄회로가 여러 곳에 삼엄하게 달려있다. 사찰의 허락을 얻지 않으면 전혀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물론 위대한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유산해설사를 배치하는 등의 융통성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장경각이라고 부르는, 팔만대장경판과 그 밖의 경판들을 간직하고 있는 장경판전이다. 남북의 두 건물에는 국간판, 곧 팔만대장경판이 보존돼 있고, 그 사이 동쪽과 서쪽 끝의 두 건물에는 팔만대장경보다 앞서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경판들을 비롯해 사찰에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만든 경판, 즉 사간판이 보관되어 있다.

    남북의 두 건물에는 수다라장과 법보전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수다라장은 부처님이 설하신 경을 총괄해 일컫는 말이고, 법보전은 대장전의 다른 뜻으로 대장경을 봉안하는 사찰의 전각이라는 뜻이니 두 건물의 쓰임새를 이해할 수 있다. 두 건물은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정면 15칸 측면 2칸인데 기둥 위에 보 받침을 끼우고 그 위에 주두, 쇠서를 짜서 장식하는 공포 양식의 익공계로 우진각지붕 홑처마집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공포가 기둥머리 바로 위에 받쳐진 주심포 양식이라고도 하는 데 일반적으로 주심포계에서 익공계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으로 보고 있다.

    보통 절집에서 간행한 경판을 보관한다는 뜻의 사간판고라고 불리는 동서의 두 건물도 정면 2칸 측면 1칸에 공포가 주심머리를 받치는 주심포 맞배지붕 홑처마집이다. 가야산 해인사 장경판전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정상적이라면 장경판전은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올 무렵 신축됐으리라 추측은 하지만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나 기록은 찾기 어려웠다. 조선 세조 4년(1458) 장경판전이 비좁고 허술하므로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40여 칸을 다시 짓게 하려 했으나 12년 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혜왕후가 뒤를 이어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성종 12년(1481)에 장경판전 보수를 착수해 7년 뒤인 1488년에 공사를 마쳤다는 사실을 암막새에 새겨진 글씨로 미뤄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장경판전의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기둥의 수법이 고려 건물의 특수성을 대변하고 있는 아름다운 배흘림기둥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이전의 건물을 마음속에 담고 나올 뿐이다.

    (마산제일고등학교 교사·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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