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옥은 없다 - 백무산
고깃집 뒷마당은 도살장 앞마당이었다
고기 먹으러 갔다가 그집에서 일하는 친구 따라 갔다
구워먹는 데만 하루에 황소 서너 마리를 소비한다는
대형 고깃집 하루에 수백 명이 한꺼번에 파티를 열고
회식을 하고 건배를 하고 연중무휴
요란하고...2018-11-01 07:00:00
- 캥거루 백을 멘 남자-재난문자 - 민창홍
벽이 높다
개가 짖는다
담이 흔들린다
지진인가?
3층 높이의 나무가 이따금 바람을 보낸다
30년 전 푸릇푸릇 돋아나던 나뭇잎
푸르고 싱싱하게 성장한 나무
명예퇴직을 하는 동료를 보내듯 단풍잎 날려 보내고
창살을 사이에 두고 손 내밀어 주시는
접견실 수녀님의 기도처럼
그녀가 있는 ...2018-10-25 07:00:00
-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 이상국
面에서 심은 코스모스 길로 젊은 며느리들이 꽁지머리를 하고 달리기를 한다. 그들이 지나가면 그리운 냄새가 난다. 마가목 붉은 열매들이 길을 막아서보지만 세월은 그 키를 넘어간다.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여름이 또 가고 나니까 민박집 간판처럼 허술하게 떠내려가다 걸린 나무등걸처럼 ...2018-10-18 07:00:00
- 손만 잡고 자다 - 안화수
가을 색이 절정이던 지난 주말, 잠자리에 들면서 아내의 가슴에 입술을 천천히 가져갔습니다 건포도 같은 젖꼭지는 수줍어 금세 돌아누웠습니다 아직도 혈기 왕성한 나는 아내의 볼을 만지다가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한참 동안 쓰다듬었습니다 손가락이 지나갈 때마다 갱년기 지나...2018-10-11 07:00:00
- 다리 - 고영조
전화가설공 김씨는 공중에 떠있다. 그는 허공을 밟고 활쏘는 헤라클레스처럼 남쪽하늘을 팽팽히 잡아당긴다. 당길 때마다 봄 하늘이 조금씩 다가왔다. 공중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 들린다. 사랑해요. 화살처럼 달려가는 중이다. 붉은 자켓을 펄럭이며 ...2018-10-04 07:00:00
- 내 친구 점순이 이야기 - 황시언
서른여섯 해 만에 동기생 산행을 간다니까
산촌으로 재혼한 점순이가 전화를 해왔다
단체식사를 꼭 사고 싶단다
먼 곳에서 자기 동네까지 왔으니 당연하단다
며칠을 거절했지만 식당예약까지 해 두었으니 취소할 수 없단다
행사 당일 점순이가 안내한 곳은 시골장터에 있는 안동찜닭이었다
매운 맛 순한...2018-09-27 07:00:00
- 영영이라는 말 - 장옥관
어머니 마흔 번째 제사 모신 날
자리에 눕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나 죽기 전에 다시는 엄마를 만날 수 없구나 여태껏 한 번도 공들여 생각해보지 못한 생각, 내 생애엔 정말로 엄마를 다시 볼 수 없구나
그것이 죽음이라는 걸, 그 어린 나이가 어찌 알았으랴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2018-09-20 07:00:00
- 상처가 부르는 사람 - 길상호
도마 위에 쓰다 남은 양파 조각들
아침에 보니 그 잘린 단면에 날벌레들이
까맣게 앉아 있다, 거기 모여 있는 벌레들은
식물의 먼 길 바래다 줄 저승사자,
검은 날개의 옷을 접고 앉은 그들에게
칼자국이 만든 마지막 육즙을 대접하며
양파는 눈을 감는다 가슴에 차오르는 기억을
날개마다 가만히 ...2018-09-13 07:00:00
- 흑자인생 - 윤재환
우리가
경제적으로 계산을 할 때
이익이 나면 검은색으로 쓰고
손해가 나면 빨간색으로 쓴다
그래서
흑자 또 적자라 부른다
나는
일기나 편지나
시를 적을 때도
검은색 펜으로 쓴다
나의 삶의 이야기는
온통 검은색으로 쓴 기...2018-09-06 07:00:00
- 닭, 극채색 볏 - 송재학
볏을 육체로 보지 마라
좁아터진 뇌수에 담지 못할 정신이 극채색과 맞물려
톱니바퀴 모양으로 바깥에 맺힌 것
계관이란 떨림에 매달은 錘이다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감옥이다
극지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낙타의 혹처럼, 숨표처럼
볏이 더 붉...2018-08-30 07:00:00
- 별사탕 - 박우담
솜사탕 장수의 모자에는 은하수가 박혀있지.
설탕 막대기로 휘저어
시간의 구름을 만들 수 있지.
우리는 구름 먹는 아이들.
오른손에 창을 쥔 반인반마의 괴물들이지.
끝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말의 귀와 발굽을 가진 시간의 자식들을
얼마든지 낳을 수 있...2018-08-23 07:00:00
- 먹은 죄 - 반칠환 쌔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가까스로 허물 벗고 날개 말리던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2018-08-16 07:00:00
- 오토바이와 개 - 김기택
오토바이에 달린 개줄에 끌리어
개 한 마리
오토바이 따라 달려간다.
두 바퀴와 네 다리가 조금이라도 엇갈리면
개줄은 가차없이 팽팽해지고
그때마다 개다리는 바퀴처럼 땅에 붙어서 간다.
속도가 늘어나도 바퀴는 언제나 한 가지
둥근 모양인데
개다리는 네 개에서 여덟, 열여섯……
활짝 펼쳐지는 ...2018-08-09 07:00:00
- 사철나무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2018-07-26 07:00:00
- [시가 있는 간이역] 점심, 후회스러운 - 정일근
한여름 폭염. 무더운 거리 나서기 싫어, 냉방이 잘 된 서늘한 사무실에서 시켜 먹는 편안한 점심. 오래 되지 않아 3층 계단을 힘겹게 올라올 단골 밥집 최씨 아주머니. 나는 안다, 머리에 인 밥과 국, 예닐곱 가지 반찬의 무게, 염천에 굵은 염주알 같은 땀 흘리며 오르는 고통의 계단, …… 나는 안다, 머리에 인 밥...정민주 기자 2018-07-19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