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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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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촌놈과 촌사람 사이에서- 박태일(시인·경남대 교수)

이름 앞세워 호들갑 떠는 촌놈…난 촌님인가, 촌사람인가

  • 기사입력 : 2011-09-0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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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계에 있다 보니 연구비 심사를 위해 서울로 올라갈 일이 생긴다. 자료 수집과 같은 일을 빼면 갈 일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모처럼 갖는 나들이인 셈이다. 지난달에도 두 차례 다녀왔다. 여러 사람이 모여 면접 심사를 하는 자리였다. 한 주일 앞선 서류 심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면접에 오르게 된 지역 대학 한 연구단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았다. 그 연구단 책임자가 학자로서 살아온 큰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릴 정도였던 나는 손수 만나는 일에 자그만 설렘까지 느꼈다.

    그런데 예정대로 나온 그는 이십 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면담 시간을 의제에 대한 소개와 연구비 지원의 당위성을 요령 있게 풀어나가는 데 시종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얼마나 세상이 알아주는 학자며, 요즘에도 지역에서 어떠한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데 방점을 찍고 있는 게 아닌가. 면담 자리에 앉아 있었던 인접 전공 심사자들 낯빛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핵심에 벗어난 이야기를 왜 저리 하는지. 그에게는 죄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때 내 마음 벽을 툭 쳐 오르는 말 한마디가 있었다. ‘저런 촌놈.’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그를 떠올렸다. 남다른 학문적 개성과 열정을 앞세워 그가 이룬 바에 대하여 호의를 지니고 있었던 나다. 그럼에도 만남은 실망스러웠다. 어느새 정년을 몇 해 앞둔 나이 아닌가. 아직까지도 자기 입으로 제 명성을 강변해야 할 만큼 허명에 대한 자의식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일까. 버릇 든 자기 과신이 도진 까닭인가. 그런데 정작 내가 받은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지역 안에서 공인으로서 내 행태를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자괴감 탓이었다.

    ‘촌놈’이란 말이 있다. 그 일컬음에 어떤 당당함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농촌에 뿌리박은 어버이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담보로 도시로 올라와 억척스럽게 자리를 잡아 나갔던 근대 산업화 격동기였다. 오래도록 촌놈이라는 일컬음은 매끄럽고 약삭빠른 ‘도시놈’에 대한 자기 위안이며, 열등감을 버티는 자위 방식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도시화를 이룬 오늘날 촌놈이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덤비거나, 단순 무지한 됨됨이에 붙이는 비아냥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좁은 지역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몰려다니거나, 귀치 않은 이름을 앞세워 호들갑을 떠는 일도 전형적인 촌놈 버릇이다.

    내 잣대로 볼 때 사람 나이 육십을 넘어섰음에도 세상에 자신을 납득시키려 든다면 어리석을 따름이다. 나이는 무기가 아니다. 그가 살아온 삶의 내력이 본보기로 환하게 드러나 있는 마당이다. 공인이라면 더 그렇다. 학자는 학문이, 작가는 작품이, 장사꾼은 번 돈이 그 터무니다. 너절하게 따질 필요가 없다. 모름지기 나는 내 이름값을 다하며 살아 왔는가를 자문해 볼라치면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감당할 몫이 분명해진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름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남았다면 입은 다물고 세상에 이름 빚 갚는 길로 실천궁행할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심사에서 만났던 그는 자신이 몸담은 곳으로 잘 돌아갔을 것이다. 당일 심사를 마치고 또 가봐야 한다고 생뚱하게 떠벌리던 그 모임 자리도 잘 마쳤으리라. 나 같은 동학 후배가 그에게 지니게 된 실망감과 무관하게 내가 얻은 일깨움은 분명했다. 어느새 나 또한 아랫사람에게 나이 든 ‘촌놈’으로 조롱을 당하고 살아야 할 처지에 이른 것이 아닌가. 두려워라, ‘촌님’ 자리는 어렵더라도 ‘촌사람’ 자리 정도는 지켜야 할 터인데. 서울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내 부끄러움은 터널 속 기차 침목처럼 더욱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박태일(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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