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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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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덕진(창원전문대 복지학부 교수)

인생의 목적인 ‘큰 것을 소유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 반하는 것

  • 기사입력 : 2010-10-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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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가 들면서 화장실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래서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는 것이 아까워서 화장실에 책을 두기로 했다.

    최근에는 작고하신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1권씩 가져다 놓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토지’라니! 선생에게 약간은 면괴(面愧)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절집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참아야 할 근심이 많다고 하여 사바세계(裟婆世界)라 하고,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 하여 근심을 푸는 장소라고 하지 않는가. 멋대로의 해석에 선생께서 해맑은 미소를 지으실 것 같기도 하다. 다시 읽는 중에도 ‘토지’는 몸과 마음이 전율로 떨리는 육근진동(六根震動)을 하게 만든다. 망연자실(茫然自失)! 이렇게 위대한 작가와 동시대에 숨을 쉬고 살았던 행운에 다시 한번 더 감사하게 된다.

    박경리 선생께서는 생전에 종종 ‘이자론(利子論)’을 말씀하셨다. 선생께서는 자연의 풀잎이나 곤충도 그 삶이 인간과 같다고 본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이기심에 근거한 욕망을 앞세워서 생존에 그치지 않고 남은 것까지 취하려고 해 자연의 질서와 균형까지 깨트려 버린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어서 이대로 가면 지구의 생태계는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금(元金)인 땅은 그대로 살리고 그 땅에 작물을 심어 가꿔서 이자(利子)만으로 살자고 간곡하게 호소한다. 선생은 이자로 사는 것이 우주의 질서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과 개발이란 미명 아래 그 질서를 깨뜨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선생의 이런 사상은 동아시아 전통과 그대로 연결된다. 주지하듯이 불교에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용어가 있다. 우주의 모든 것, 유정중생인 나와 너는 물론이고 심지어 생명이 없는 무정중생까지도 하나의 몸인 천지자연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보살(佛菩薩)은 일체중생을 동일체로 관찰하여 대자비심(大慈悲心)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자비심이 바다처럼 커지면 깨달음은 저절로 일어나기 때문에, 깨침과 동체대비는 궁극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열반(涅槃)이 대자비가 되고 대자비가 열반이 된다.

    뿐만 아니라 유교에서도 역(易)의 이론을 들어 존재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설파하였다. 이때 역은 일(日)과 월(月)의 의미가 되기도 하고 일(日)과 물(勿)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앞의 풀이에서 일(日)은 양(陽)이고 월(月)은 음(陰)이다. 즉 천지 자연의 모든 변화가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뒤의 풀이는 해[日]를 거역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즉 천지자연의 섭리를 배반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평수가 좀 더 넓은 아파트에서부터 배기량이 큰 차 등에 이르기까지 ‘큰 것을 소유하는 것’에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조차도 그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우리들의 이러한 맹목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의 본성은 질식상태에서 점점 쇠약해져 간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생활환경이 파괴되어 붕괴의 징후를 보이고 있고, 인간 경제에 없어서는 안되는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고갈도 눈앞에 보이고 있다. 모두가 큰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생기는 결과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천지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큰 것이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때가 지금이다.

    이덕진(창원전문대 복지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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