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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01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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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최고 경영자, 붓다!- 이덕진(창원전문대학 장례복지학과 교수)

“불교가 세계적 종교가 된 것은
중생을 부처처럼 여기는 경영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

  • 기사입력 : 2010-05-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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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은 석가탄신일이다. 절집에서는 승속(僧俗) 모두가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만, 중생의 입장에서는 하루 한가롭게 쉴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맙다. 그러다가 ‘지금 우리에게 불교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고 잠시 상념에 젖어본다. 이런저런 생각이 오가는 중에 나는 불교를 대기업이라고 보고 붓다를 최고경영자라고 간주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실소(失笑)! 하지만 상상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어떤 ‘경영 마인드’가 불교를 지난 수천 년 동안 융성하게 하였고, 앞으로도 계속 흥성하게 할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의 끝에 나는 ‘중생(衆生)이 곧 부처’라는 명제가, 붓다와 그 이후 2500여 년 역사를 일관하는 정신이라고 과감(?)하게 결론 내린다. 아래의 부연은 그 알음알이의 조각들.

    이 명제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로, 이 명제는 인간의 본질이 그 무엇에도 예속될 수 없는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임을 천명한다.

    중국의 선사 임제는 중생인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곧 진리의 땅이며, 그곳에 있는 우리가 바로 주인공이라고 설파한다. 이것은 인간이 영위하는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부처의 삶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 그 자체가 불국토라는 의미에 다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고 지각하고 인식하는 우리 사람 안에 있으며, 부처란 바로 면전에서 법을 듣는 이 사람이고, 열반이란 바로 이 사람을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열반은 ‘불어 끄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불어서 꺼지는 것은 사람마다의 탐욕의 불꽃이다. 갈망은 계속하여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난다.

    따라서 열반은 사물에 묶이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외부세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열반은 인간의 갈망하는 경향을 불어서 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환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환경들에게 자신을 속박시킨 족쇄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유란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의해서 노예로 만들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무것, 아무 사람도 깨친 이를 노예로 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전지전능한 신이 부처가 아니라 부족한 것 투성이인 인간이 부처라는 의미를 가진다. 더 나아가서 사제, 국왕 혹은 부자 등과 같은 사회적 강자가 부처가 아니라 신도, 백성, 천민 혹은 가난한 자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부처이다.

    선지식(善知識) 유마힐은 말한다. “중생이 병을 앓을 때 보살도 병을 앓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의 병도 낫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에 다름이 아니다.

    이것은 사제, 대통령, 국왕, 기업체의 사장 혹은 부자와 같은 사회적 강자의 존재 이유는 신도, 백성, 천민, 기업체의 종업원 혹은 가난한 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섬기기 위해서라는 의미도 된다. 불교가 오늘날 세계적인 종교가 된 이유는 중생을 부처처럼 여기는 경영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기업, 국가, 조직, 종교든지 이러한 사고를 가진다면 흥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이러한 원리에 반하는 기업, 국가, 조직, 종교는 그 생명이 길 수가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덕진(창원전문대학 장례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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