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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괴담이 소문을 거쳐 여론으로 정화돼야 - 장성진(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기사입력 : 2008-05-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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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경문왕은 화랑 출신이다. 스물이 채 되기 전에 사방을 유람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왕의 요구로 그 깨달음을 보고하여 부마가 되고, 결국은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이 되자 갑자기 귀가 길어져서 나귀 귀처럼 되었다. 이 사실을 숨기고자 하였으므로 왕후와 궁인들까지도 몰랐다. 단 한 사람 관을 만드는 복두장이만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소문내지 않기로 묵계를 하고 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마침내 복두장이가 죽음에 다다라 도림사 절간 대밭에 가서 실컷 외쳐댔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문은 왕의 귀에까지 들리고, 못마땅해진 왕은 대나무를 다 베고 산수유를 심게 하였다. 그러자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은 귀가 크신 분.”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동서양 여러 곳에 있지만, 한국식은 서양식과 달리, 비밀을 알고 있는 이발사를 죽인다든지 하는 살벌함이 없어서 좋다. 뿐만 아니라 더 큰 지혜를 숨기고 있다. 소문을 어떻게 참아내고 긍정적으로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젊을 때는 세상에서 수많은 소문을 들어 거기서 삶의 지혜를 받아들였다. 왕이 되어서는 자기에 관한 소문이 듣기 싫어지자 소리를 줄였다. 성질대로 확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꺼칠한 댓잎 소리를 연한 산수유 소리로 바꾸는 일은 그러한 지혜이다.

    소문이란 바람과 같다. 언제나 어디론가 바람이 불듯이 소문은 끊임없이 일어나 움직이다 사라지고, 또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바람은 때로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날려버리기도 하지만 세상의 많은 것을 바꿔주고 소통시키기도 한다. 소문도 그러하다. 때로는 개인이나 사회에 치명적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알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도 하고 발설 본능을 풀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혜로운 통치자는 부질없이 소문을 잠재우려고만 하지 않고 오히려 귀 기울여 듣고 활용하였다. 제왕이 패관을 널리 흩어보내 민간의 거리에 흘러다니는 소문을 모으게 한 일이나, 백성의 일상적 노래를 들어 관현에 올린 것은 그러한 예이다.

    근래에 ‘괴담’이라는 말이 정치권의 중심부에서 자주 나오고 이것이 언론매체를 통해 국민의 눈과 귀에 전달된다. 수년 전 청소년 대상 영화에 자극적 제목으로 붙으면서 유행하더니, 지금은 더 확대되어 쓰인다. 민감한 정치 현안인 쇠고기 수입 문제, 조류독감과 이로 인한 가금 처분, 의료보험 제도, 공기업 구조 개편 등 시민 생활과 밀접한 문제에 관하여 정부가 몹쓸 정책을 추진한다는 비난과, 그것은 불량한 집단의 악의에 찬 음해라는 대응 과정에서 쓰이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그 내용 자체가 조작된 괴담이라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렇게 몰아붙인다고 반발한다.

    소문이 순기능과 역기능을 함께 가진 말 흐름이라면 괴담은 역기능으로 기울어진 말 흘림이다. 소문을 괴담으로 타락시키는 요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말의 소통이 막히는 사회적 상황이고, 하나는 말을 부리는 사람의 그릇된 태도이다. 개인을 넘어선 국가 단위의 규모에서는 일반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독재와 그 장치로 활용하는 정권의 언론 장악이 전자의 대표적 예라면, 그 사회를 이념적 또는 제도적으로 혼란시키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세력의 암약은 후자의 대표적 경우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의 괴담론은 어느 모로 보나 이런 종류가 아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안타깝다면 안타깝다. 한마디로 미숙성과 성깔이 원인이다.

    마냥 맞설 수만 없는 일이라면 접근의 선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위 괴담에는 악의적이거나 무지에 의한 거짓이 상당히 섞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걸러야 할 대상이지 함께 있는 참까지 통째로 버릴 대상은 아니다. 그리하여 바람처럼 자연스러운 소문의 단계로 올려 놓고, 그것을 다시 정화하여 여론으로 발전시켜 받아들여야 한다. 정치가 여론을 살피는 일은 아름답지만 여론이 정치를 곁눈질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여론에 승복하는 일은 현명하지만, 여론을 통제하는 것은 우매하기 때문이다.소문이란 필요하면 공론의 장으로 올려야 한다. 그것이 거짓으로부터 참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금요칼럼

    장 성 진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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