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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축제와 이데올로기 / 우무석(시인)

  • 기사입력 : 2008-02-2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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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어떤 나라를 보더라도 피를 동반한 혁명을 축제로 하는 나라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 한 시인이 ‘전통 있는 생활문화와 예술행위만이 축제가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글을 읽었다. 과연 그런 걸까?

    프랑스의 인류학자이면서 사회학자인 장 뒤비뇨는 <축제와 문명 designtimesp=5426>이라는 책에서 축제를 규칙의 위반을 넘어서서 그것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탈문화의 세계, 즉 규범이 없는 공포의 공간을 생성시키는 세계와 대면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질서를 바꾸는 기회나 가능성의 잠재적인 실체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축제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프랑스대혁명 과정을 아예 축제적 상황으로 인식하였다. ‘1789년’으로 상징되는 축제가 계속되면서 그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표상과 기호 그리고 규칙들을 파괴하거나 폐기해 버렸다. 이 경험이 바로 앙시엥 레짐(구체제)의 종말이었던 것.

    그러나 그 축제의 정점은 기요틴에 머리가 잘리는 정치의 비극적 표현으로 장식되었다. 파리시의 혁명광장, 바스티유 광장 등에서 하루 5명씩 모두 2632명이 머리가 잘리는 ‘피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런 극단적인 ‘피의 축제’를 공식화하기 위해 그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그날을 대혁명의 기원으로 삼아, 혁명이 끝나기 한참 전인 1791년 국회에서 표결에 부쳐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버렸다.(프랑스대혁명이 끝나는 시점은 1799년이다) 그들이 이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시민들에게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원초적인 시간을 기념하기 위함이었고, 기념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그 시간의 ‘보전’을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역사의 주체는 축제의 주체가 되는 것’이었고, 축제는 하나의 이념적인 행사가 되어 버렸다.

    이제 장 뒤비뇨의 논리에 동의한다면, 축제의 본질적 의미를 확장시켜 우리의 현대사에 대비시켜 볼 수도 있겠다. 해방 이후 첫 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와 무리한 헌법개정에 의한 장기집권 도모가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 저항이 4월혁명이다. 2·28로 시작해서 3·15 의거가 정점이 되고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도 하나의 ‘축제 구조’로 상정해 본다면 프랑스대혁명과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문화정치적 영역은 거의 유사할 듯싶다. 이는 축제가 우리 삶이 존재하기 위해 파괴해 버려야 할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상징적 행위이기 때문이며, 지상에서 최대한의 행복과 즐거움을 찾기 위해 기존의 제도와 질서에 저항하는 일종의 근원적인 혼동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 카오스적 상태가 잠시 동안 ‘일상생활과의 단절’과 함께 ‘세상의 가장 완전한 혁신적 기도(企圖)’를 드러내면서 현대성의 가치로 전도(顚倒)시켜 버렸다. 소위 시민이 국가로 통합되어 가는 상징화 작업이 축제가 되었고, 반대로 국민이 절대국가의 체제에 도전하는 것도 축제의 본질이 된다. 그래서 근대국가들을 변혁시킨 코뮌 형태의 집단적 항쟁들은 축제라 명명할 수 있다. 프랑스대혁명은 그 상징을 의식화하고 그들이 거둔 거대한 성취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연극과 문학장르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렇지만 혁명 이후, 근대의 신흥계급인 부르주아들은 축제를 만국박람회장으로 끌어내어 찬란한 기술문명으로 장식하여 산업의 폭력적이며 폭발적인 힘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그 축제들의 상징물들이 쇠와 유리로 결합된 산업미학으로 탄생시킨 에펠탑이나 크리스탈궁 등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스펙터클이 축제이고, 산업생산력이 축제의 본질이고, 시장바닥이 축제장이다. 그러므로 현대성의 축제에서 소비문화라면 그런대로 축제의 전제가 될는지는 몰라도 ‘전통 있는 생활문화’나 ‘예술행위’는 축제가 될 조건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인간은 축제 속에서 새로 태어나기 위해 인간이 소외된 물신사회에 부단히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우무석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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