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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조선 500년 장수비결을 보라 - 조용호 (논설위원)

  • 기사입력 : 2007-06-01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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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조가 이(李)씨 단일 성씨로 519년(1392~1910) 정권을 세습한 것은 유교와 언론 시스템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유교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 즉 군신간의 도리이다. 각자의 본분을 지키는. 이른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이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비가 아비답고. 자식이 자식다움을 말한다. 이런 유교적 사상이 왕조국가를 유지하는 이념의 틀이 됐다는 것이다.

    언론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알 수 있다.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임금. 472년간의 기록을 정리한 ‘실록’(實錄)은 국정 전반과 왕의 언행을 담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사관이 기록하는 내용을 왕이라 해도 볼 수 없으며. 편찬은 왕의 교체 이후에 한다는 것이다. 왕의 ‘입김’을 차단하는 조치이다. 사관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적어 놓았다가 후일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는 일. 참으로 막중한 역할이 아닐 수 없다. 왕으로서도 훗날 오명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재위(在位) 동안 국가와 백성만을 생각해야 한다. 잘못하여 폐위되면 역사서의 이름도 ‘일기’(日記)로 격하되니.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실록’이 아닌 ‘일기’로 남아 있다.

    편찬 체제와 격식에서 1년치 ‘기사’(記事)를 한 권으로 편성하고. 6개월 혹은. 2개월. 1개월 단위로 한다. 기록을 ‘기사’라고 했으니. 왕의 역사기록이 ‘기사’이다. 실록이 편년체의 연대기 형태라고 말하지만 편찬자들의 비판적 안목과 역사관이 많이 가미된 역사서이어서 비판과 감시를 주요 기능으로 하는 오늘의 기사와 다를 바 없다. 왕을 비판한 내용을 후세 기록으로 남겨. 당대 왕이 바로 가도록 한 일. 조선 500년을 지킨 언론 시스템이었다.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도 언론3사(三司)로서 간쟁 탄핵 규찰 시정 경연 등 언론업무를 맡았다. ‘실록’은 훈민정음과 함께 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공자가 오경(五經) 중 하나인 ‘춘추’를 지으면서 춘추직필(春秋直筆)이라고 썼다. ‘잘한 것은 잘한 것이고. 못한 것은 못한 것’. 대의명분에 입각하여 사실대로 바르게 쓴다는 말이다. 정론을 말하는 공자의 경고. ‘춘추’ 책이 나오자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떨었다.

    권력과 언론은 어차피 대립한다. 비판 언론을 좋아하는 권력자는 없다. 다만 언론을 잘 이용하는 독재자는 있다. 레닌은 언론의 기능을 선전. 선동. 조직이라고 했다. 북한은 여기에 문화교양자적 기능이라는 것을 추가하여. 긍정적 모방을 통한 감화교양이라고 불렀다. 나쁜 사건이 신문에 나면 보고 배우게 되니. 좋은 기사만 써야 한다는 순전히 북한식 언론관이다. 그래서 북한 신문에는 비판기사는 물론. 사회면이 아예 없다. 신문만으로 관찰할 때 북한은 강·절도. 살인 등 강력사건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는 유토피아이다.

    하지만 선전 선동 조직이 난무하는 나라에서 무슨 언론이 있겠는가. 선전상이 우대받는 나라가 과거 히틀러의 나치독일이었다. 김정일도 노동당 선전선동부장을 거쳐. 조직비서와 선전비서를 겸임함으로써 김일성 생존시 비로소 2인자가 되었다.

    정부의 부처 기자실(브리핑룸)의 통폐합 조치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이미 수년 전에 진행되었던 경남지역 시·군청의 기자실 폐쇄이다. 김두관씨가 남해군수로 당선되자 군청에 있던 기자실을 없애버렸고. 이런 현상은 여타 시군으로 전파돼. 마치 개혁의 척도처럼 미화됐다. 그런 남해에서 최근 힐튼이라는 특정 골프장이 불법영업을 한 사실을 들춰낸 것은 `쫒겨난' 기자들이니 행정은 어떻게 해명하겠는가. 매우 오래 전 더러 기자실의 폐해가 있다 했지만 폐쇄할 정도는 아니었다.

    막강한 행정권력을 쥐고 수백조 국민예산을 쓰는 정부를 기자가 ‘죽치고 앉아 있어도’ 제대로 감시해 내지 못한다. 외국처럼 내부 고발자(deep throat)가 많은 것도 아니다. ‘알 권리’라는 말은 차라리 사치스럽다. 국민이 조금이라도 손해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언론과 기자가 있다. 조용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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