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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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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논술 주제별 강좌] (5) 국가 정의의 실현 가능성

  • 기사입력 : 2007-02-14 09: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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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음 제시문을 논거로 하여 ‘국가정의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논술하라. <서강대 2004학년도 정시논술 모의고사>
    *제시문은 뒷부분에 있음


    #출제 배경

    국가는 정의로울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국가는 ‘공정’할 것이라는. 혹은 ‘공정’해야만 한다는 관점 속에서 국가를 바라본다. 그래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문제들이 발생할 때. 유일하면서 권위 있는 조정자는 국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러한 조정능력이 미흡할 때 국가는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란 모든 사회계약론이 언급하고 있듯이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고 그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현실의 국가는 정말로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아니. 적어도 그러한 공정과 정의를 국가의 존립 목적으로 상정하고 있을까? 혹은 국가라는 엄청나게 거대한 구조물이 공공의 복리와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 존재할 수 있을까?


    20세기는 야만의 세기였다고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더한 국가의 폭력과 학살. 전쟁과 내전으로 몸살을 앓았던 시대가 바로 20세기였다. 그뿐인가. 이 시대의 학살과 폭력은 어느 때보다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나치즘이 그러했고. 매카시즘 역시 그러했다.

    [사진설명]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상고심 선고공판(사진 위)과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한 청년을 곤봉으로 무참하게 폭행히는 모습. 연합뉴스DB 


    국가는 언제나 그 태생부터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폭력을 합법화하기 위한 수많은 기구와 이데올로기들을 생산한다. 개인에 대한 국가의 억압은 언제나 ‘국가이익’ 혹은 ‘안보’ 혹은 ‘합법적 폭력’이라는 허울로 치장돼 왔으며. 그 속에서 개인은 폭력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신의 정당성을 보호받거나 입증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감시와 차별. 공동체로부터 소외됨이 그들의 온 인생을 지배하던 핵심적 요소였다.


    국가보안법의 미명 아래 사라진 수많은 사람과 그들의 가족.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지금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대체복무를 요청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안보 혹은 이익이 없다면 우리에겐 지옥뿐이라는 단선 논리와 무자비한 공포를 사회에 퍼뜨리며 그러한 폭력을 재생산해 왔다. 그런데도 국가는 정의로울 수 있는 것일까?


    이 문제는 그 질문에 답하기를 요구한다. 그러한 답변에 도달하기 위해 이 논제는 국가의 의미에 대해 각기 말하고 있는 세 개의 제시문을 배치한다.

    # 논제 분석

    논제에서 요구하는 바는 매우 뚜렷하고 단순하다. 말 그대로 국가정의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정의가 선행돼야 한다. 또한 ‘국가정의’가 무엇을 지향하며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에 대한 전제도 고민해 봐야 한다. 동시에 실현 가능성을 타진하라는 말 속에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일어난 문제의 지점을 짚어 보고. 발생 원인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좀 더 세부적으로는.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수많은 정의롭지 않은 폭력이나 현상은 국가라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순간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국가라는 구조는 얼마든지 정의로울 수 있지만 그것이 권력이 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국가라는 구조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권력을 잡는 개개인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폭력과 부정이 나타나는 것인지 등을 나누어 보며 고민을 심화시켜 보는 것도 좋다.
    마지막으로 실현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위에서 제시한 문제의 해결지점과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 방향 잡기

    제시문을 풍부하게 읽어 낸다면. 그리고 그 제시문의 내용을 현실의 문제들과 접목시켜 읽어 낸다면 좋은 논의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제시문의 논의에 기반해 본다면. 부당한 폭력으로 인해 국가정의의 실현 가능성은 상당히 멀어 보인다. 제시문 [나]와 [다]는 구체적 국가폭력의 결과를 문제로 드러내고 있다. 자국민 살해나 희생 요구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당한 국가 폭력이 어째서 정당화될 수 있었는지 단초를 제시한다. 부당함을 정당함으로 뒤바꾸기 위한 국가의 교묘한 장치들이 소개된다. 이러한 장치의 사용이 위에 제시한 문제들을 나타낸 구조적 원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설명]  지난달 23일 서울중앙법원 재심에서 32년 만에 사형집행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자 오열하는 유가족. 연합뉴스 

    제시문 [가]에서는 국가정의를 구성하는 내용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윤리적이고 경제적인 정의가 실현되는 국가가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라는 부분을 읽어 내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그 속에서 단초를 찾아 제시할 수 있다. 반면. 제시문에서 제시하는 방향에는 동의하지만 국가정의의 실현방법으로 지배계급의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도 있다. 즉 선량하고 훌륭한 개인이 정치를 잘 하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인 정의의 실현 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 된다.
    이러한 지점들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나]와 [다]에서 보여 주었던 문제를 극복하고 [가]에서 단초가 제공되는 이상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를 논증하는 과정으로 글을 써 나가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글을 쓰게 된다면. 제시문을 설명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와 [다]에서 보이는 문제가 현실의 한국 사회에서는 어떠한 문제로 나타나는지 함께 고민하면서 자신의 문제로 끌고 와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문제들이 나타나는 구조적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나타나는지를 분석하고 보여 주는 과정을 통해 국가폭력과 국가기구 사이의 관계를 세밀하게 나타내 줄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가]에서 나타난 방향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정의가 어째서 필요한 것인지를 논증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자신이 분석한 원인에 근거해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다른 방향의 논술도 가능하다. 고민의 틀을 좀 더 열어 보면. 다시 국가정의의 실현 가능성이라는 큰 문제에 대해 답을 내려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한편의 극단에는 ‘모든 국가는 정의로울 수 없으며. 따라서 국가정의의 실현 가능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다른 한편의 극단에는 ‘이 모든 폭력은 궁극적인 국가정의를 위해 필요악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논의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그 논의의 스펙트럼들에 걸맞은 논증과 문제해결의 방향이 모색될 수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논의 방향이 존재하겠지만 예를 들면. 이런 것을 참고할 수 있다.


    *경제적 정의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정의는 국가가 담당할 수 없다. 모든 국가는 그 자체의 지배를 굳건하게 만드는 것에만 복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정의의 실현 가능성은 없다. 국가가 아닌 다른 대안적 구조를 생각해야 한다.


    *국가정의는 반드시 실현돼야 한다. 그때의 정의는 경제적 정의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정의 역시 포괄되어야 한다. 문제는 국가기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권력의 독점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국가에 주어진 폭력과 권력의 분산이 필요하다.


    *국가정의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그때의 정의는 경제적 정의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정의 역시 포괄되어야 한다. 국가기구가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는 것은 필요악이다. 문제는 합법적 폭력이 부당한 폭력으로 전환되고 그것이 정당화되면서 나타난다. 따라서 그러한 전환과 악용을 감시할 수 있는 민주적 합의의 구조가 필요하다.  <경남초암아카데미 제공 >


    <서강대 2004학년도 정시논술 모의고사 제시문>

    [가]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孟子)를 설궁(雪宮)에서 만났다. 왕이 말하였다.
    “현자(賢者)에게도 또한 별궁 놀이 같은 이런 즐거움이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백성들이 그런 즐거움을 가지지 못하면 그 임금을 비난합니다. 즐거움을 갖지 못하였다 하여 임금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임금이 되어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못하는 것도 또한 잘못입니다. 임금께서 백성들의 즐거움을 즐기면 백성 또한 임금의 즐거움을 즐기고. 임금께서 백성들의 근심을 근심하면 백성들도 또한 임금의 근심을 근심합니다. 천하와 같이 즐거움을 같이 하고 천하와 같이 근심을 같이 한 뒤에 천하의 왕 노릇을 하지 못한 분이 아직 없었습니다. 옛날에 제경공(齊景公)이 안자(晏子)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전부산(轉附山)과 조무산을 관광하다가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낭야에 이르는 것이니. 내 자신이 어떻게 하여야 선왕(先王)들의 관람과 견줄 수 있으리오?”
    안자가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좋으신 질문입니다. 천자(天子)가 제후에게 가는 것을 ‘순수(巡狩)’라고 하니. 이것은 수비하는 것을 순시하는 것입니다. 제후가 천자를 뵙는 것을 ‘술직(述職)’이라고 하는데. ‘술직’은 직무를 보고하는 것이니. 일거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봄갈이 하는 것을 살피시고 인력이나 곡식 등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시고 가을 추수를 살피시고 모자라는 것을 도와주십니다. 하(夏)나라의 속담에 ‘우리 임금께서 노시지 않는데 우리가 어찌 쉴 수 있으며. 우리 임금께서 즐기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어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 한번 놀고 한번 즐기심에도 다 제후의 본보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에는 그렇지 못해서 임금의 많은 군사가 출행시 군사들이 양식을 징발하여 굶주린 자도 먹지 못하고 노동한 자도 쉬지 못하며. 백성들끼리 눈을 흘기며 서로를 헐뜯어 백성들이 마침내 사악한 짓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이 왕의 명령을 어기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음식을 버리기를 물같이 함이 유련황망(流連荒亡)하여 제후들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물 흐름을 따라 내려가서 돌아오는 것을 잊음을 ‘유(流)’라고 일컬으며. 산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연(連)’이라 합니다. 사냥을 나가서 싫증 낼 줄 모르고 보내는 것을 ‘황(荒)’이라 일컬으며. 술을 즐겨서 싫증 낼 줄 모르고 정사를 태만히 하는 것을 ‘망(亡)’이라고 합니다. 선왕들은 ‘유련’을 즐기거나 ‘황망’하는 행실이 없었습니다. 오직 임금께서 행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경공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나라에 훈령을 내리고 궁궐 밖으로 나와 교외에 숙소를 정해 머무르는 한편 곡식 창고 문을 열어 부족한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제선왕(齊宣王)이 물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명당을 헐어 버리라고 합니다. 헐까요. 말까요?”
    맹자가 대답하였다.
    “명당이라는 것은 천하에 왕 노릇을 하신 분들의 집입니다. 왕께서 왕천하(王天下)하시는 정치를 행하시려거든 허물지 마옵소서.”
    “왕정에 대해서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옛날 문왕(文王)이 기(岐)를 다스릴 때에 농민에게는 정전법(井田法)을 쓰고 관리에게는 세록(世祿)을 주었습니다. 관문이나 시장에서는 살피기는 하되 통행세나 영업세를 받지 않고 못과 어장의 고기잡이를 금하지 않았으며 죄인을 다루되 그 죄가 처자식에게까지 미치지 않았습니다. 늙어서 아내가 없는 것을 ‘환(鰥)’이라 하며. 늙어서 지아비가 없는 것은 ‘과(寡)’이며. 늙어서 자식이 없는 것은 ‘독(獨)’이요. 어려서 부친이 없는 것은 ‘고(孤)’입니다. 이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에 호소할 데도 없는 불쌍한 백성들입니다. 문왕이 정치를 하여 어짊을 베푸실 때 먼저 이 네 가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부유한 이들이야 괜찮지만/ 애달픈 건 이 고단하고 외로운 사람들’
    “옳으신 말씀입니다.”
    “왕께서 옳으시다면 어찌하여 인정(仁政)을 실행하시지 않으십니까?”
    ― 《맹자》 중에서

    *설궁(雪宮): 제왕의 별궁 이름
    *문왕(文王): 주(周)나라 시조


    [나] ① 국가는 사회에 있는 다른 조직에 비해서 어떠한 특징이 있는가. 회사라든가. 교회라든가. 위계구조를 가진 조직도 많고. 사람들을 관리하는 조직도 많습니다. 국가가 그런 조직들과 어떤 식으로 다른가 하면. 이른바 ‘정당한 폭력’을 독점하고 있다. 혹은 독점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조직이라는 점입니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그것이 근대국가의 본질입니다.
    이 ‘정당한 폭력’은 3종류가 있습니다. 경찰권. 처벌권 그리고 3번째가 교전권입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전쟁이라면. 그리고 전쟁법에 따른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고. 세계의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심히 불가사의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국가가. 즉 경찰이든 재판관이든. 혹은 군대가 막스 베버가 말하는 ‘폭력’을 사용할 경우. 웬일인지 그것은 충격적인 일이 되지 않습니다. 개인이 같은 행위를 한 경우와 달리. 그것을 한 것이 국가라면 아무 것도 충격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됩니다. 거기에는 국가의 마법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 우리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세속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국가는 아직 완전히 탈신비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왕권신수설의 시대에는 국가(국왕)는 신(神)의 대리로서 질서를 확립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국가에는 성스러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정치사상에 있어서 국가는 세속화되었습니다. 국가는 국민주권에 근거한 공리주의적인 사회계약으로 된 조직이며. 신비적인 요소는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국가에는 폭력행위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변화시키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국가의 마법이라고 부르고 싶은 힘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마술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요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② 20세기는 홉스의 이론이 대대적으로 실험된 시대였습니다. 이제 2천년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실험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100년간을 되돌아볼 때 어떤 모양이었는가 생각해봅시다. 결과는 확실합니다. 20세기만큼 폭력에 의해 살해된 인간의 수가 많았던 100년간은 인류의 역사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선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기록입니다. 그리고 누가 가장 많이 사람을 죽였는가 하면. 개인도 아니고. 마피아도 아니고. 조직깡패도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입니다. 전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을 죽여 왔습니다.
    하와이대학의 럼멜이라는 학자가 쓴 《정부에 의한 죽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얼마만큼의 인간이 국가에 의해서 살해되었는가 하는 통계를 수집해온 전문가입니다. 국가에 의해서 살해된 인간의 수는 이 100년 동안 2억3백31만9천명 즉 2억 명에 달합니다. 이것은 그의 결론입니다. 혹시 이 숫자는 과장된 것일지 모릅니다. 과장된 것이라 해도. 절반으로 줄여보아도. 결론은 변함없습니다.
    20세기에는 괴물과 같은 국가가 몇 있어서. 그것이 이 무시무시한 통계를 만들어 놓은 게 확실합니다. 나치 독일이 600만 명. 혹은 그 이상의 유태인을 살해했다고 말해지는데. 그것도 이 숫자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럼멜에 의하면.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는 고의적인 아사(餓死)정책이 있어서. 이것도 통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고방식에 따라서는 그것을 포함시키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무시무시한 숫자. 가공할 통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또 하나 경악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누구를 죽여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살해된 사람이 거의 외국인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가공할 통계라 하더라도 어떻든 국가는 자기 국민과의 처음의 약속을 지켜 왔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각 국가가 적국의 군대를 죽인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살해된 것은 외국인보다도 자국민 쪽이 압도적으로 다수입니다. 럼멜에 의하면. 국가에 의해서 살해된 약 2억 명 가운데 1억2천9백54만7천 명. 약 1억3천만 명이 자국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는 여기서도 또 600만 명의 유태인이라든가. 스탈린이 죽였다고 하는 농민들도 포함한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잘 생각해 보면. 지금의 세계에도 자기 국민밖에 죽이지 않는 군대를 가진 국가는 많이 있습니다. 필리핀 군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외국인과 싸워 본 일이 한 번도 없지만. 필리핀 사람들을 많이 살해해 왔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인은 인도네시아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죽여 왔습니다.
    이것은 어느 멕시코 사람에게서 들은 얘기이지만. 멕시코는 어째서 군대를 갖고 있는가? 누구와 전쟁을 하는가? 남쪽으로 접해 있는 작은 나라 과테말라와 전쟁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측하고 있지 않으며. 북쪽 국경을 향하면 미국이 있는데. 미합중국과 전쟁한다면 멕시코 군대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군대가 있는가. 멕시코인 자신과 전쟁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는 남부의 치아파스주 원주민과의 분쟁이 크게 신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계였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살해된 전쟁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자국민 사이의 오랜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살해한 2억 명은 대부분 전투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가 간의 전쟁에서도 군인이 죽는 수보다도 비전투원 사망자 수가 반드시 더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군대는 죽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무기를 갖고 있고 훈련을 받아. 몸을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으므로 죽이기 힘듭니다. 그것에 비해서 비전투원은 무기도 갖고 있지 않고. 자기방어 훈련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지킬 방법을 모릅니다. 전장에서 되는 대로 도망가지만. 매우 죽이기 쉽습니다.
    럼멜은 데모사이드(democide)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고의적으로 비무장 민간인을 죽인다는 의미입니다. 데모사이드는 전쟁에서 적의 군대를 죽인다고 하는 국제법으로 허용된 ‘정당한 폭력’과 달리. 국가에 의한 명백한 살인입니다. ‘민살(民殺)’이라고 해야 할지 모릅니다. 럼멜에 의하면. 전쟁에서 ‘정당하게’ 죽은 군인의 수보다도 ‘민살’로 죽은 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국가에 의해 살해된 2억 명 중에 ‘정당한’ 전사자는 3천420만1천 명이지만. 국가에 의한 민살은 1억6천919만8천 명으로 약 5배나 됩니다.
    또 하나. 럼멜이 통계로 실증해 보여 주는 것은 국가가 권위주의적일수록 사람을 죽이는 수. 특히 민살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정부를 전체주의. 권위주의. 대의민주주의 등 3개의 카테고리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로써 민주주의를 옹호하려고 합니다. 확실히 이것은 민주화운동의 대의명분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잊어서 안 될 것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나라는 이른바 대의민주주의 국가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중에서



    [다] ① 중미 대륙 중심지 멕시코시티 소재의 인류학 박물관 전시실을 들어서면 고대 멕시코인(아스테카)들의 주신 태양신의 거대한 암각 형상과 그에 대한 잔혹한 인신공희(人身供犧) 석조 제단이 눈앞을 압도한다. 그리고 갖가지 상형문이 새겨진 그 제단의 중앙부에는 제물로 지목된 사람의 살아 있는 심장을 꺼내어 바치는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어. 주위에 전시되어 있는 날카로운 적출기구(골제 칼)와 함께 전율을 금치 못하게 한다.
    게다가 박물관 안내문이 밝히고 있는 그 인신공희 제의의 동기와 목적에는 더욱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 첫째. 태양신이 살아 있는 사람의 피의 제물을 기뻐하기 때문이며 <종교적 의의 designtimesp=17157>. 둘째 신정체제의 통치자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이를 이용하였으며(이 경우 통치자는 사제를 통하여 태양신이 누구누구의 심장을 원하노라 그의 위험한 정적들을 지목하게 했을 것이다). 셋째 인구조절 책으로 이용하여 유아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기도 하였다(주변 전시실에는 어린 심장을 바친 유아의 유골들이 진열되어 있다). 인신공희의 동기나 목적과 관련한 유골 연구자의 설명이다. 뿐이랴. 지금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당시 사람들은 그 끔찍스런 제의를 회피하려 하기는커녕 내세의 존재와 구원을 굳게 믿고 남 앞서 그 천국의 영락을 누리고자 기쁜 마음으로 자랑스럽게 자기 심장을 바쳤다는 것이다.
    정말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기자에겐 아무래도 상상이 미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즘 때마침 그와 관련해 퍽 의미 있는 시사를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 만났는바. 본도 출신 문학평론가 송일씨의 《국가와 시의 충동》이 그것이다. 송일씨는 이 책에서 시(詩)의 빛이 솟아나는 시어의 궁극적 경계를 탐색하는 가운데에 국가. 교회. 철학. 역사 영역의 언어들을 광범하고 세심하게 검토한 끝에. 그 언어의 주어(국가)는 자신과 대상 사물(인민)들을 욕망하고 명명(의미부여. 규정)하며 유지. 지배. 확장해 가는 권력적 ‘술어의 세계’ 가운데에 자리함을 밝힌다. 그것은 그 보상으로 인민의 삶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이자 권리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고대인들의 인신공희는 그 국가라는 주어의 ‘술어’가 구조해낸 권력의 지배제도였음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일차적 시사에 불과하다. 이 책은 나아가 그 국가가 술어의 세계를 넘어 시의(시적) 충동(죽음. 황홀. 작열)을 일으킬 때의 재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술어로 오염되지 않은(술어가 무의미한) 시어의 근원적 ‘존재성’과 그 솟아오름의 ‘황홀’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그 권력적 술어의 세계와 시의 세계를 프로이트의 초자아(아버지. 국가. 이성)와 이드(아들. 인민. 충동)의 대위 관계로 번역한 다음. 이렇게 의미 깊이 적고 있다.
    “‘이드(Id)’는 ‘자아’의 아명이다. 이드는 야생마처럼 날뛰고. 자아는 이 짐승을 길들여 정해진 목표 지점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목표 지점을 정하는 것은 기수가 아니라 초자아다. 자아란. 아버지에 의해 길들여진. 혹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이드 자신이다.
    … 자아는 이드의 생존 전략의 한 국면이다. 그러나 그의 전략은 빗나간다. 초자아는 이드의 에너지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박쥐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드는 - 아버지의 보상적 보호 속에- 안전할수록 점점 더 빈혈이 되고. 아버지의 거래는 늘 흑자를 기록한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의 예술화(충동. 황홀)가 홀로코스트(대학살)를 부르는 생물학적 이유다. 정염에 휩싸인 국가는 불을 지필 에너지를 인민의 이드로밖에 달리 얻을 것이 없다. … 저 나치즘의 유태인 학살. 군국 일본의 가미가제 광란이 바로 그런 끔찍스런 본보기 아닌가.”
    신정체제의 멕시코도 아마 - 어쩌면 불가피하게 - 그 위험한 시의 충동에 빠졌던 것이 아닐까? 백성들이 자신의 산 심장을 기쁨으로 바치는 인신공희의 ‘황홀’은 그렇게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듯싶다. 그리고 본 기자는 여기 지금 우리 땅엔 이른바 국가수호의 책임이란 미명 아래 그 같은 권력의 폭력적 징후가 일렁이고 있지 않은지 심히 우려스런 의구심을 덧붙여 두고 싶을 뿐이다.
    ② “한 국가나 역사의 이념은. 실은 그 권력과 이념의 상술은 항상 내일에의 꿈을 내세워 오늘의 땀과 희생을 요구하고. 그 꿈과 희생의 노래 목록 속에 오늘 자신의 성취를 이뤄가지만. 오늘의 자리가 없는 인민의 꿈은 언제까지나 그 성취가 내일로 내일로 다시 연기되어 가는 불가항력 같은 마술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지요. 국가의 본질이 그렇고” …
    ― 이청준의 《신화를 삼킨 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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