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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논술 강좌] (4) 시대와 역사

  • 기사입력 : 2007-01-17 09: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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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안적 역사 해석'에 초점 맞춰라

    ■ 연세대학교 2002학년도 정시 인문계열 논술문제
    ※ 동일한 사물과 사건일지라도 그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다. 제시문 [가]. [나]를 참조하여 [다]와 [라]의 차이점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한 뒤. 그것이 지닌 사회·문화적 의미를 오늘날의 문제와 연관 지어 논술하시오. (1.800자 내외)  <제시문은 뒷부분에 있음>

    [사진설명]  연세대학교 2007학년도 정시모집 논술고사에서 응시생들이 답안을 작성하고 있다. /연합뉴스/


    <출제배경 >

    역사는 현실과 유리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일들이 동북아 3국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 문제와 독도에 관련된 영토분쟁. 그리고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논쟁은 동아시아의 과거를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이미 알고 있듯이 과거는 죽은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논쟁이 죽은 시체를 두고 벌이는 쟁탈전일 리 없다. 과거는 현재의 삶과 질서의 정당성의 근거이며 현재의 의도가 과거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상호 의미를 규정하며 ‘역사’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부단한 해석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과거에 대한 해석은 결국 우리가 주변 세계를 끊임없이 해석해 가는 과정의 한 단면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논제는 과거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한계를 가진 언어로 사물과 대상을 표현해야만 하는 인식론의 문제로 확장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제시문 [가]의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은 그러한 고려가 담겨 있는 배치이다. 나머지 브레히트의 시와. 동일한 인물을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서술한 진수와 나관중의 글은 인간의 인식론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역사 기술의 차이를 분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논제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인식의 차이. 관점의 차이가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구체적 현상을 거론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논제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주변 현상의 다양한 관점을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비판적 인식을 갖추었는지에 관한 검증일 것이다. 수많은 쟁점이 현대사회의 복합성을 가중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각각의 입장은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태도가 필요하다. 반드시 해석된 사실이라는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을 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비판적이고 수동적인 ‘현대인’의 상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해석의 차이를 현실로 확장하기>

    이미 논제에서 답안의 방향은 일정 부분 제시하고 있다. 제시문 [가]에서는 절대적 진리의 불가능성과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제시문 [나]에서는 역사 해석의 관점의 상대성을. 그리고 제시문 [다]와 [라]에서는 그 구체적인 사례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런 다음 그것을 현대 사회의 문제로 연결시킨다면 논의의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이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우리는 역사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왜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고려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고민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번 논제를 역사 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절대주의가 갖는 맹점을 사회 ? 문화적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고. 지식 권력이 절대적 진리의 대변자가 되었을 때 갖는 허위를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모든 지식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정당성과 상호 비판의 긍정적 기능을 강조하는 방향도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이해할 경우 지적 허무주의에 도달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다양한 해석의 공존이 그 해석 가운데 좀 더 타당한 해석을 판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대안적인 역사 해석의 가능성과 긍정성>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글의 방향은 논의의 쟁점을 대안적인 역사 해석의 가능성과 기능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 누락된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누락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해 보면 이 논제의 답안을 구성할 때 학생들의 위치에서 접근하기 쉽고 또한 핵심적인 내용을 만들 수 있는 방향이 될 것이다. 국사책을 보면 주로 과거사는 정치를 사회문화의 영역에 앞세운다.

    여기에는 몇 가지 관점을 자연스러운 전제로 삼는다. 과거의 의미 있는 사실은 주로 중앙의 공식적 제도적 행위에 국한하거나 그것을 다른 것에 우선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중앙의 제도적 정치행위를 의미한다. 현대적인 용법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여의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행위들을 떠올리는 그 개념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 삶의 기본적인 원리이자 힘의 관계가 일상의 영역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정치의 영역은 상당히 넓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는 정당이나 선거라는 제도적 행위 이외에도 인간관계나. 소비를 통한 개인의 자율성의 실현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다. 정치를 이런 개념으로 전제하고 현실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기술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개념의 변화는 사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식의 구분법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사회가 이러한 영역으로 명쾌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생각은 그러한 구분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관습 안에서 만들어진 인식에 가깝다.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을 역외무역에 맞춰 주변국 사이의 국제관계를 바라보거나 민중들의 소비생활과 문화양식을 연결한다든지. 개인 간의 서신이나 구술자료 같은 ‘비역사적’ 사료를 통해 일상과 개인을 중심으로 그 시대를 묘사하는 것도 전혀 다른 과거의 의미를 포착하게 해 줄 것이다.

    국사를 독립된 단위로 바라보는 것도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 과연 한반도의 역사는 주변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지. 오히려 주변국 사이의 관계를 통해 우리를 파악하는 것이 풍부한 의미를 남겨 주지 않는지 반성해 볼 대목이다.


    <지식의 권력적 기능에 대한 비판적 접근>

    사실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은 권력으로서 지식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하는 구체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를 좀 더 다른 시각으로 풍부하게 묘사해 보려는 것은 역사를 단지 객관적으로 구성하자는 의도뿐만 아니라 사회의 권력이 어떻게 지식을 통해 정당화되는지를 분석하는 과정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온 역사란 바로 그 사회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세력의 관점과 언어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과 언어가 공인되는 과정에는 항상 다른 관점과 언어는 배제되기 마련이다. 중앙의 제도적 정치 행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은 민중들의 일상적인 행위나 기록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과거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진지하고 의미 있는 행위와 그렇지 않고 사소하고 의미 없는 행위는 본래 진지함과 사소함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택과 배제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관점의 차이에 따라 실재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태도는 지식의 절대적 권위를 해체하는 의미를 갖는다. 지식(인)이 기존질서와 기득권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공인하고 정당화했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경남초암아카데미 제공/

    <연세대 2002학년도 정시 인문계열 논술문제 제시문>

    [가] 개념적 지식의 한계나 상대성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일은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실재를 표현해 놓은 것이 실재 그 자체보다 훨씬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며. 우리는 곧잘 이 둘을 혼동하여. 이 개념과 상징을 실재 그 자체로 착각하곤 한다. 이러한 미혹을 떨쳐 버리게 하는 일이 바로 동양 신비 사상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불교의 선사들이 이르기를.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니. 달을 인식한 후에는 그 손가락 때문에 우리가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 또한 도가의 현자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있으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 따위는 잊혀지게 마련이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해 필요하며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혀지고 만다. 말은 생각을 전하기 위해 있으며 생각하는 바를 알고 나면 말 따위는 잊고 만다.
    서양에서는 의미론자인 알프레트 코지프스키가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는 분명한 어구로 똑같은 견해를 적확하게 표현했다.(중략)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궁극적인 실재란 추론의 대상이나 형상화할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나 개념의 근원이 되는 감각이나 지성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 적절하게 기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실재를 도라고 규정한 노자는 《도덕경》의 첫 줄에서 똑같은 사실을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어느 신문을 읽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인류가 근 2천 년 동안 엄청난 양의 논리적 지식을 축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현명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바로 절대적 지식은 언어로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중략)

    직관적인 통찰이 일관성 있는 수학적 논리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거나 일상적 언어로 그 의미를 쉽게 풀어낼 수 없다면 물리학자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때 수학적 논리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추상화의 과정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실재의 지도(地圖)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들과 상징들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실재의 지도는 몇 가지 특성만을 나타낼 따름이다. 우리들은 이것이 정확히 어느 것인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릴 적부터 비판적인 분석 없이 우리의 지도를 조금씩 재구성해 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은 그 의미와 범주가 분명하게 규정된 것이 아니다. 단어들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들의 대부분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별 의미를 만들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갈 따름이고. 우리가 어떤 단어를 들을 때 의미들은 대부분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게 된다.(중략)

    공간과 시간은 이제 관찰자가 자연 현상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언어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각 관찰자는 그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술할 것이다. 그들의 기술로부터 어떤 보편적 자연 법칙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는 그들이 모든 좌표계에서 설정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즉 임의의 위치에서 상대적 운동을 하고 있는 모든 관찰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법칙들을 공식화해야 한다.(중략)

    고전 물리학에서는 막대기가 운동하고 있을 때나 정지하고 있을 때나 그 길이가 똑같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한 물체의 길이는 관찰자가 느끼는 운동의 상대성에 따라서 다를 수 있으며. 또 그것은 그 운동 속도에 따라서 변화한다. 그 변화란 물체가 움직이고 있을 때 축소된다는 것이다. 막대기는 그것이 정지 상태에서 길이가 가장 길고. 상대 속도가 증가할수록 관찰자에게는 짧게 느껴진다. 고에너지 물리학의 ‘산란(散亂)’실험에서 입자가 지극히 빠른 속도로 충돌할 경우 그 축소가 너무도 심하기 때문에 공 모양과 같은 입자들이 ‘빈대떡’처럼 납작한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람의 그림자 실제 길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묻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한 물체의 ‘진정한’ 길이를 묻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림자란 3차원 공간에 있는 점들이 2차원 평면 위에 투영된 것이며. 그래서 그 길이는 투영의 각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는 4차원 시공 속에 있는 점들이 3차원 공간에 투영된 것과 같으며. 그것의 길이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 -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에서

    [나]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들의 이름만 나온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누가 그 도시를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 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밤에 미장이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많은 사람들이 찬미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이 살던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 혼자서?
    시이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대동하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당하자
    울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을 누가 냈던가?

    그 많은 보고報告들.
    그 많은 의문들.
    - 브레히트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에서

    [다]
      태조(太祖) 무 황제는 패국 초군 사람으로 성(姓)은 조(曹). 휘(諱)는 조(操). 자(字)는 맹덕(孟德)이었다. 전한 상국(相國)을 지낸 조참의 후손이었다. 환제 때 조등은 중상시와 대장추를 지냈으며. 나중에는 비정후에 봉해졌다. 양자 조숭이 이어받아 태위의 관직에 이르렀지만.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떻게 양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조숭이 태조를 낳았다.
    태조는 어려서부터 임기응변하는 기지가 있었으나. 멋대로 놀기를 좋아해. 덕행과 학업을 닦는 일을 등한히 하였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양(梁)나라 사람 교현(橋玄)과 남양의 하옹만이 달랐다. 교현이 태조를 일러 말하기를 “천하는 장차 혼란에 빠질 것인데. 세상을 구할 만한 재목이 아니면 이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나이 스물에 효렴에 천거되어 낭관이 되었고. 낙양 북부 지역의 위에 임명되었다가. 돈구현의 현령으로 옮겼으며. 다시 불려가 의랑으로 임명되었다. 한나라 영제 광화 말년 황건이 난을 일으키자. 기도위에 임명되어 영천의 황건적을 토벌하였고. 승진하여 제남국의 상(相)이 되었다. 제남국에는 10여 개의 현이 있었는데. 장리들 가운데 대부분이 귀족과 척신에게 아부하고 뇌물을 받는 일이 횡행하였다. 이에 태조가 상주(上奏)하여 그 중 8명을 파직시켰고 음란한 제사를 엄금하니 간악한 자들이 모두 숨어버려 군내의 질서가 안정되었다. 얼마 후에 소환되어 동군 태수로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는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기주자사 왕분. 남양 사람 허유. 패국 사람 주정 등이 호걸들과 연합하여 영제를 폐위시키고 합비후를 옹립할 계획을 세우고 태조에게 알렸지만. 태조는 그런 제의를 거절하였다. 왕분 등의 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금성 사람 변장과 한수가 자사와 군수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무리가 10여만 명이나 되어 천하가 소란하였다. 조정에서는 태조를 불러 전군 교위로 삼았다. 때마침 한 영제가 죽고 태자가 즉위하였으며. 태후가 조정을 장악하여 정치를 했다. 대장군 하진은 원소와 더불어 환관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지만. 태후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진은 동탁을 불러들여 태후를 협박하려 했는데. 동탁이 낙양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살해되었다. 동탁은 낙양에 들어와 황제를 폐위시켜 홍농왕으로 삼고. 헌제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리하여 수도는 크게 혼란스러웠다.

    동탁은 태조를 효기 교위로 삼아 그와 함께 조정의 모든 일들을 의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사잇길을 따라 동쪽고향 초군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호뢰관을 빠져나와 중모현을 지나갈 때. 정장의 의심을 받아 현읍까지 압송되어 갔다. 마을 사람 중에 어떤 이가 태조를 알아보자. 그에게 부탁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이때 동탁은 마침 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하였다. 태조는 진류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군사들을 소집하여 동탁을 토벌할 준비를 했다. 겨울 12월에 기오에서 처음으로 군대를 일으켰으니. 그 해가 영제 중평(中平) 6년이었다. …
    초평(初平) 2년 봄에 원소와 한복은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지만. 유우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름 4월 동탁은 장안으로 돌아왔다.
    - 진수. 《삼국지》 위지(魏志)무제기(武帝紀)에서

    [라]  그의 관직은 기도위로. 패국 초군 사람인 조조인데 자는 맹덕이다. 그의 아버지는 조숭으로. 본래 성은 하후씨였으나 중상시 조등의 양자로 입적하여 조씨가 되었다. 조조의 어릴 때 이름은 아만이라 하기도 했고. 길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그는 권모술수에 능했다.(중략)
    조조가 자라서 청년이 되었을 때. 교현(橋玄)이란 자가 조조의 집에 놀러왔다가. “장차 천하가 어지러울 때에는 하늘이 내린 재주를 갖지 않으면 이를 능히 구해낼 수 없네. 이를 구해낼 사람은 오직 자네뿐일세”라고 조조를 칭찬했다.
    또한 조조를 본 남양의 하옹은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가 망하고 어지러울 때. 천하를 다스릴 자는 오직 이 사람뿐이로다.”
    여남 땅에 허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조조는 그를 찾아가서 “선생님 저는 장차 어떤 인물이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허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조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허소가 말했다. “그대는 태평성세에는 능한 신하가 되겠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간계가 뛰어난 영웅이 되겠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중략)

    조조는 성을 나와서 초군으로 달아났다. 길을 가던 중 중모현에서 관문지기에게 붙잡혀 현령의 문초를 받게 되었다. 조조는 “나는 떠돌이 장사꾼으로 성은 황보라 합니다”라고 말했다. 현령은 조조를 유심히 살펴보고 무언가 깊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전에 내가 낙양에 있을 때 그대가 조조라는 것을 알았다. 왜 그대는 자신을 숨기려 하는가? 이 자를 옥에 가두어라. 내일 수도로 압송하여 상을 타리라”(중략)

    그 날 밤 진궁은 노자를 마련하여 조조와 함께 변장을 하고 칼 한 자루씩을 가지고 슬그머니 관청을 벗어나 고향을 향해 말을 달렸다. 3일 동안을 달려 성고 지방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앞서서 달리던 조조는 채찍을 들어서 숲이 우거진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마을에 여백사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우리 아버님과 결의형제한 분이오. 집안 소식도 들을 겸 오늘 밤 그 곳에서 묵어가도록 합시다.” … 여백사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 다시 나와 진궁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 안에 좋은 술이 없어 서촌으로 가서 술을 좀 사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나귀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중략)

    두 사람은 살며시 뒤꼍으로 다가갔다. 그 곳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묶어서 죽여버리는 것이 어떨까?” 조조가 진궁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 생각이 맞았소. 먼저 선수를 써서 처리해 버립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잡혀 죽고 말 것이오.” 말을 마치자 조조는 진궁과 더불어 칼을 빼들고 들어가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죽이니 여덟 사람이 죽었다. 조조가 나머지 사람들을 찾아 부엌으로 가보니. 그 곳에는 잡으려고 묶어 놓은 돼지 한 마리가 있었다. 진궁의 마음은 아프고 괴로웠다. “맹덕. 우리가 너무 소심해서 죄 없는 생사람을 잡았구려.” 두 사람은 급히 말을 타고 여백사의 집을 나와 달아났다. 한두 마장쯤 달려가다가 그들은 나귀를 타고 돌아오는 여백사 노인과 만났다. 백사의 나귀 안장에는 술 두 병과 갖가지 안주가 실려 있었다. 여백사는 떠나는 그들을 한사코 만류했다.
    “아니 조카는 이 밤중에 어디로 가는 중인가?”
    “예. 쫓기는 몸이라 오래 머물 수가 없어 떠나는 길입니다.”
    “내가 나오면서 집안 사람들에게 돼지 한 마리를 잡으라고 했다. 어서 현령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자.” 여백사는 간청하다시피 만류했다.
    조조는 듣지 않고 길을 서둘렀다. 몇 걸음 가지 않아서 조조는 갑자기 칼을 빼들고 도로 돌아가서 여백사에게. “저기에 오는 저 사람이 누구입니까?”하고 소리를 쳤다. 여백사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조조의 칼이 여백사의 목을 내리쳤다. 여백사의 머리는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진궁이 크게 노하여 조조를 꾸짖었다.
    “조공. 이게 무슨 짓이오!”
    “여백사가 집에 돌아가서 식구가 다 죽은 것을 보면 우리를 그냥 놔두겠소? 사람들을 풀어 우리를 뒤쫓을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꼼짝없이 큰 화를 당할 것이오.”
    “알고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의에서 크게 벗어나오.”
    “차라리 내 편에서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할 수는 없소.”
    조조는 차갑게 대답했다. 진궁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 나관중. 《삼국지연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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