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5일 (월)
전체메뉴

[경남시론] 위임받은 권한과 책임있는 자세- 조정우(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 기사입력 : 2024-02-20 19:15:07
  •   

  • 몇 달 전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서 새로 입주자대표회가 구성됐다. 그런데 이번 입주자대표회에서는 아파트 주민들에게 의견을 묻는 찬반 투표를 유독 자주 실시하고 있다. 아파트 상가의 한 빵집이 무단으로 아파트 소유지를 사용한 것에 대해 소송을 해야 할 것인가와, 또 지난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업체로부터 부당한 사례금을 받은 것을 회수하였는데 이 돈을 어떤 용도로 쓰면 좋겠는가 등 아파트의 재산상 문제에 대해부터 투표가 시작됐다. 그리고 나서는 엘리베이터 교체 설치 업체 선정에 대한 의견 투표를 하더니 엘리베이터 디자인에 대한 투표도 또 했다. 곧이어 두 대 이상의 차량을 등록한 세대에 대해 주차요금을 대폭 인상하는 것에 대한 투표도 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주부터는 아파트 내 공중전화부스를 철거하는 것과 장기수선계획의 수정에 대해 찬반을 묻는 투표를 한다고 엘리베이터에 굵은 글씨로 공고문을 붙여 두고 매일 저녁마다 방송을 하고 있다. 법적으로 공동주택에서 거주자 투표를 부쳐야 하는 사안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이렇게 자주 또 사소한 것까지 찬반 투표를 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투표 공고를 본 어떤 이웃은 “그냥 자기들이 결정하면 되지 뭘 이렇게…”라고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대학 교수인 필자는 한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가상의 상황을 부여하고 그 선택의 근거를 제시하라는 문제를 낸 적이 있다. 학생 자신을 학교 전산실의 관리자로 설정하고, 만약 국산 제품인 아래아한글(ㅎ·ㄴ글)과 세계적 범용제품인 엠에스워드(MS-WORD) 중 하나만을 컴퓨터에 설치할 수 있다면 관리자로서 어떤 제품을 설치할 것인지를 결정하여 그 근거를 대는 문제였다(물론 실제로는 두 제품 모두 설치할 수 있다). 그런데 답안 중 몇몇은 전산실을 이용하는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하여 다수가 요청한 바에 따라 설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다수결에 따르겠다고 한 셈이다.

    얼핏 공정하고 객관적인 대답 같지만, 이는 사실 관리자로서의 권한을 방기한 무책임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컴퓨터의 운용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관리자임에도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 책임을 미뤄버리는 것이다. 만약 설문조사 결과가 50:50으로 나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ㅎ·ㄴ글 51표, 엠에스워드 49표라면 ㅎ·ㄴ글이 표결에서 이겼기 때문에 엠에스워드 사용자 49명은 전산실 이용을 포기해야 하는가? 어떤 학생은 설문조사에 나온 비율대로 설치하겠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는데, 만약 그렇게 하려면 설문조사의 결과가 전산실을 이용하는 학생들 전체를 대표해야만 한다는 문제가 또 생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다양한 원리의 집합이다. 흔히 민주주의 하면 다수결을 떠올리듯, 다수결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데 있어 하나의 원리이지만 선거를 통해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것 역시 중요한 원리이다. 사실 다수결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토론과 협상, 타협 등의 방법을 총동원해도 합의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갈등이 첨예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결정 방식이다. ‘표결에 부친다’는 것은 더 이상 상호 합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주자대표회는 규정에 따라 주민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되어 아파트의 운영과 유지에 관련된 주요 사항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의사결정기구이다. 주민들의 재산권과 거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선거로 권한을 위임받고 그 권한을 행사하는 대의체이다. 물론 무보수 봉사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치라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지향을 실천하는 조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 계속 표결에 부쳐 최후의 수단인 다수결에 의지하고자 한다면 대표를 선출한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대표회가 아니라 선관위라 해야 하지 않을까.

    조정우(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