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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ON- 뭐하꼬]진해 웅천읍성 나들이

백성이 쌓은 성벽에 올라 역사를 만나다

  • 기사입력 : 2023-04-20 2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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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 진해구 위치한 경남도 기념물 제15호
    조선 세종때 일본인 불법 거주 늘어나자 축조
    임진왜란 후 조선군 일본방어 최일선기지
    전체 둘레 936m였지만 동벽 500m만 남아
    성벽엔 경상도 백성 이름 새겨진 명문석
    ‘장수 지휘소’ 문루에 오르면 장수된 기분
    1~5코스 ‘웅천역사둘레길’ 걸으며 힐링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熊川)은 현재는 동 명칭 중 하나지만 과거에는 외교, 군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웅천지역의 성곽들은 웅천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지역에는 조선시대 최초의 개항장이었던 제포왜관이 설치돼 조선 전기 한일간 문화와 문물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봄나들이 삼아 경상남도 기념물 제15호인 웅천읍성을 다녀왔다.

    웅천읍성 동문루. 견룡문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전투할 때는 장수의 지휘소로도 이용됐으며 2011년 복원됐다.
    웅천읍성 동문루. 견룡문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전투할 때는 장수의 지휘소로도 이용됐으며 2011년 복원됐다.

    읍성은 관청과 민가를 비롯한 고을 중심부를 둘러 쌓은 성으로,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담당하는 성을 말한다. 웅천읍성은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에 있는 평지성으로 세종 16년(1434년)에 만들어졌다. 웅천 제포(내이포)는 부산포, 울산의 염포와 함께 태종 7년(1407년)에 개항해 왜인을 연안지역에 한정해 정박하게 하고 통상을 허락한 곳이었다. 일본과 무역을 하면서 일본인들의 불법거주가 늘어나자 고을을 보호하기 위해 웅천읍성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주둔하던 웅천왜성에 딸린 성으로도 사용됐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군의 대일본방어 최일선 기지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고종 32년(1895년) 읍성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웅천읍성 옹성 뒤로 보이는 동문루.
    웅천읍성 옹성 뒤로 보이는 동문루.

    웅천읍성은 전남 순천 낙안읍성과 달리 성 내부에 전통가옥이 없다. 세종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짓는 과정에서 평면 모양이 정사각형에서 현재처럼 직사각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둘레는 936m이며, 현재는 성의 동벽 500m 정도만 남아있다. 북쪽 성벽은 진해-부산간 국도를 건설하면서 철거됐고, 서쪽과 남쪽 성벽은 민가와 도로 등이 들어서면서 일부 훼손됐다.

    주차장에서 웅천읍성 쪽으로 향하면 동문루가 있다. 웅천읍성에는 4개의 대문이 있었고, 동문은 견룡문, 서문은 수호문, 남문은 진남루, 북문은 공신문으로 불렸다고 한다. 문루는 궁문, 성문 등의 출입문 위에 높게 지은 건물로,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으며 전투할 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활용됐다. 현재 웅천읍성 동문루는 2011년에 복원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로 팔작지붕을 얹었다. 동문루에 올라서면 성 안과 바깥 모두 보인다.

    동문루의 오른쪽에는 해자가 있다. 해자는 성벽 밖에 도랑을 둘러 파고 물을 채워 적의 침입을 막는 시설로 웅천읍성은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에 해자가 있었다. 해자 바닥에는 돌을 깔고 적이 건너지 못하도록 뾰족한 나무 말뚝을 촘촘히 세워뒀다. 동쪽 성벽에 있는 해자는 성벽 밖으로 7~12m 떨어져 있다. 해자 주변에는 해자를 건너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다리인 조교가 있다. 해자를 가로질러 나무로 만든 다리를 놓고 줄을 매달아 필요한 경우에는 다리를 들어올렸다.

    웅천읍성 해자. 성벽 밖에 도랑을 둘러 파고 물을 채워 적의 침입을 막는 시설이다.
    웅천읍성 해자. 성벽 밖에 도랑을 둘러 파고 물을 채워 적의 침입을 막는 시설이다.
    해자를 건너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다리인 해자조교.
    해자를 건너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다리인 해자조교.

    동문루 앞에는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다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이다. 성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 옹성을 통과해야 하며,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동문 옹성은 성벽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고, 이후 증축과 개축 과정을 거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옹성은 전체 직경 18m, 내벽 직경 약 13m다.

    별도로 설치된 계단을 이용하면 동문루로 올라 성벽을 걸을 수 있다.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오르면 다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성벽에는 성곽 주변의 하천이나 해안가에 있는 돌을 성 위에 뒀다가 접근하는 적을 향해 던질 수 있는 무기로 쓰인 석환도 보인다.

    동문루 오른쪽 편 끝에는 동북치성, 왼쪽 편 끝에는 동남치성이 각각 있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감시하거나 성벽이나 성문에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웅천읍성의 치성은 모두 6개로 모서리에 4개, 동쪽 성벽, 서쪽 성벽에 1개씩 있었다. 동북치성은 길이 8.4m, 너비 5.5m 규모로 성을 쌓은 부분이 성벽의 몸체 부분(체성부)에 비해 조잡하며, 상당부의 약 2.3m는 후대에 개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남치성은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이 만나는 곳에 설치했으며 체성부와 동시에 축조했다. 너비 6.4m, 길이 10.1m이며 현재 남아있는 최고 높이는 2.25m이다.

    웅천읍성 명문석. 진주라는 지명이 보인다. 웅천읍성을 쌓기 위해 진주에서 백성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웅천읍성 명문석. 진주라는 지명이 보인다. 웅천읍성을 쌓기 위해 진주에서 백성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성벽에는 명문석도 발견된다. 명문석은 읍성을 쌓은 사람들의 이름과 출신 고을의 이름을 함께 새긴 돌로, 구간에 따라 책임자의 이름을 기록해 읍성을 지은 뒤 발생하는 문제 등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다. 웅천읍성의 명문석은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에서 모두 5개가 발견됐으며, 진주, 창녕, 청도, 합천 등의 지명이 있는 걸로 봐서 웅천읍성을 쌓기 위해 경상도 전역의 백성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성곽, 동문루, 해자, 여장 등은 복원했다고 한다.

    시간이 있다면 웅천역사둘레길도 추천한다. 모두 5개 코스이며 △제1코스 웅천읍성 동문(견룡루)-주기철목사기념관-동헌, 객사터-비석거리 △제2코스 북부마을-관정-웅천빙고지-백일마을-임도-자마산(복합유적지)-농업기술센터(식물원) △제3코스 광천교-동천-웅포해전지(흰돌메공원)-탕수바위-웅천왜성-세스페데스공원 △제4코스 괴정, 제포왜관(왜인거주지)-효자문-제덕토성-제포진성 △제5코스 진해해양공원(음지도)-명동왜성-사화랑산 봉수대-비석거리로 구성돼 있다. 웅천역사둘레길 코스 지도는 웅천읍성 주차장에서 볼 수 있다.

    웅천읍성은 경남도청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주소는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325-12.


    /주변 가볼만한 곳/

    주기철목사기념관 전경.
    주기철목사기념관 전경.

    △주기철목사기념관= 일제강점기 신사삼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펼치다 순교한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의 신앙정신, 애국애족 및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관으로 2015년 3월 24일 주 목사의 고향인 웅천에 개관했다. 웅천읍성 맞은편에 있다. 평일 오전 9시~오후 6시 관람 가능하며 일요일은 휴관한다. 기념관은 ‘일사각오’ 설교 말씀과 독립운동 당시의 현장 복원 모형 등이 전시된 면류관(제1전시실), 항일독립운동 활동으로 인한 투옥과 순교에 관한 자료, 기도처였던 무학산 십자바위를 복원한 나라사랑(제2전시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주소는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로 174.

    웅천왜성 내부
    웅천왜성 내부

    △웅천왜성=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 성 중 하나이다. 웅천왜성은 안골포, 가덕도, 거제도 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과의 연락도 편하고, 일본과의 거리도 가까운 지리적인 요충지였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3년 4월 한양에서 철수한 후 7월께 본격적으로 진을 치고 성을 쌓아 일본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다고 한다. ‘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웅포성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보수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웅천왜성은 동네 주민들의 등산로로 활용되며, 주차장서 20여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주소는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산211-1.

    글·사진= 권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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