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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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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소멸 극복 프로젝트- 경남신문 심부름센터] (10) 얼매나 더 온다꼬?

“묵고 놀고 여서 다한다” 경로당은 오지마을의 오아시스

  • 기사입력 : 2022-09-18 20: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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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이 이래 많으이 좋지, 와 안 좋아.(좋지, 왜 안 좋겠어)”

    의령군 안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궁류면 입사마을에서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마을 주민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경남신문 심부름센터가 개업 10주가 지났습니다. 오지마을에서 한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면서 마을 어르신들께 심부름센터 취재팀 마기꾼들(마을기록꾼들)은 ‘자주 봐서 좋은 자식’이 됐습니다.

    바쁜 심부름을 차례차례 마치고 마을 정자 ‘입사정’에서 휴식을 취하던 지난 15일, 어르신들은 보름달처럼 넉넉한 인심을 먹거리로 표현해주셨는데요. 삶은 고구마와 총각김치, 호박전을 곁들여 맥주를 마시고 채 소화도 덜 됐는데 사과, 배, 감까지 과일도 쉴 새 없이 내어 주십니다.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심부름꾼은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없어 입맛만 다시는가 하면, 김승권 사진꾼은 박혜정 총무님 댁 총각김치 맛에 반해 젓가락질을 쉬지 않습니다.

    빈달성(83) 할머니가 의령군 궁류면 입사마을 경로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빈달성(83) 할머니가 의령군 궁류면 입사마을 경로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10주 동안 마을 어르신들은 마기꾼들이 오는 날과 오지 않는 날의 차이도 경험하고 계십니다. 심부름센터가 오는 날에 맞춰 혼자 하시기 부담스러운 농사일을 함께 하시는가 하면 특히, 하루에 두 번(오전 9시 30분, 오후 3시 30분) 있는 버스 시간에 맞춰 볼일 보러 나가시기 힘드실 때 이를 차곡차곡 모아 마기꾼들이 오는 날 함께 나가시는 게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세금 환급, 농자재 구입, 혈압약 타러 가기, 라면값 인상 전 대량(?) 구입, 면사무소 민원, 지원금 신청 등 심부름 종류도 다양해졌구요.

    “옴마야. 뭐 타고 왔어예? 여 총각은 눈교?(누구요?)”

    “신문기자 아이가. 우리는 여(여기) 기자가 태워주는 차 타고 안 다니는교. 우리 마을 일 많이 도와준다.” 심부름센터 차를 타고 친정 나들이를 가시는 박계수(70) 어머님의 목소리가 경쾌합니다.

    한편 입사마을 어르신들과 매주 찾는 저희들을 이어주는 공간은 마을회관 역할을 겸하고 있는 ‘입사마을경로당’인데요. 10주간 봐온 경로당에서도 오지마을 삶의 ‘희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다 한다” 전천후 복합공간= “같이 모여서 밥도 해묵고, 시간도 잘 가고 이래 만나가 놀면 편코 좋지.”

    입사마을 어르신들은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논이나 텃밭으로 향해 일을 하신 뒤, 곧바로 아침 식사도 간단히 해결하고 경로당으로 출근하십니다. 경로당은 방 2칸(휴식공간, 취식공간)과 실내외 화장실로 갖춰져 있습니다.

    의령군 궁류면 입사마을 경로당.
    의령군 궁류면 입사마을 경로당.

    커피포트에 물을 데워 달달한 믹스커피 한잔을 드시면서 하루를 여시는 건 오전 8시 30분 무렵. 주로 빈달성 어르신과 윤기연 어르신이 먼저 자리를 잡으신 뒤 지팡이를 짚고 오신 마을 최고령 표종연(94) 어르신도 뒤이어 앉으십니다.

    어르신들의 적적함을 달래주는 건 TV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채널은 KBS1입니다. 아침마당, 9시 30분 뉴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가 어르신들의 지식과 교양, 시사, 건강상식까지 책임집니다. 이어 11시 뉴스가 시작될 무렵에는 보통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빈달성·윤기연(80)할머니가 경로당에서 TV를 시청하고 있다.
    빈달성·윤기연(80)할머니가 경로당에서 TV를 시청하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어르신들은 이제 점심 식사를 함께 준비하시는데요. 냉장고를 열어보면 달걀과 김치, 각종 젓갈, 밑반찬이 있고, 냉장고 옆에는 쌀과 잡곡도 놓여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냉장고 안에 있는 밑반찬에 시래기 된장찌개를 끓여 식사하시는 날이 많군요. 식사 후에는 경로당을 나서 집안일을 하시거나 들로 향하셨다가 다시 경로당으로 돌아오셔서 부족한 잠을 청하시거나 케이블 채널에서 하는 옛날 드라마 ‘미우나 고우나’, ‘전원일기’를 보신 뒤 퇴근하십니다. 노년의 삶에서 집 밖을 나와 매일 ‘갈 곳’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경로당은 큰 존재 가치를 지닙니다. 일상 속 오아시스 같은 곳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군요.

    빈달성 할머니가 경로당에서 겉절이를 만들고 있다.
    빈달성 할머니가 경로당에서 겉절이를 만들고 있다.

    어르신들의 일상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건 물론 경로당은 마을의 모든 일을 해결하는 전천후 복합공간으로도 효용성이 높습니다. 주민들이 한 번에 모이기 쉬운 마을 초입에 자리 잡고 있어 먹거리를 나누거나 마을의 소식을 전할 때 이곳이 무대가 됩니다. 택배물품을 주고받고 보관하는 도시지역의 아파트 관리실 역할을 경로당이 하기도 하고요. 최근 지자체와 한국국토정보공사가 마을에서 진행하고 있는 지적재조사 경계조정 협의 등 각종 회의 공간으로도 사용되는군요.

    마을 주민들의 안전도 책임집니다.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경남을 관통한 이달 초에는 산사태 위험지역에 있는 마을 내 2가구 4명의 어르신이 경로당으로 대피해 하루를 묵으셨고, 한여름에는 온열질환에 취약한 어르신들이 이곳에서 폭염을 피하시기도 하고 말이죠.

    경로당 입구에 붙어 있는 코로나19 4차 예방접종 안내문.
    경로당 입구에 붙어 있는 코로나19 4차 예방접종 안내문.

    ◇코로나 위기 때마다 발길 끊기지만…=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경로당 이용에 제약이 따를 땐 마을 어르신들을 우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코로나19를 빼놓을 수 없죠. 지난 2020년과 지난해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로 1년 중 몇 개월씩 문을 닫고 집에만 갇혀 있을 땐 기운이 더욱 안 나기도 하셨다고 하는군요.

    마기꾼들과 같은 청장년 세대야 비대면 활동에도 충분히 적응할 수 있지만 대면 모임이 전부인 어르신들에겐 다른 이야기겠죠. 모여서 TV 보며 이야기 나누고 한 끼 같이 만들어 먹는 게 인생의 낙인데, 그걸 못하니 저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외로움과 우울감이 파고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윤기연 할머니가 경로당 노래방 기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윤기연 할머니가 경로당 노래방 기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인구의 수도권 쏠림, 그에 따른 인구 감소와 고령화…. 지역소멸이 곧 노인 문제와도 연결되기에 경로당도 그 앞에 자유로울 수 없어 보입니다. 경로당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마을 어르신들도 더 나이 들면 운영의 어려움도 따라올 수 있고, 인구 소멸이 더욱 본격화되면 학교가 사라지듯 경로당도 하나둘 사라질지도 모르고요.

    도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의령군은 일찌감치 경로당을 중심으로 한 노인복지정책도 펼쳐왔습니다. 마을 단위로 독거노인들이 함께 숙식하는 제도인 ‘독거노인 공동거주제’를 지난 2007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행한 게 대표적인 예인데요, 공동생활가정 형태로 경남 전역을 비롯해 전국으로 확대되기도 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신영도(74세) 경로당 회장과 윤기연씨가 의령군 궁류면 입사마을 경로당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신영도(74세) 경로당 회장과 윤기연씨가 의령군 궁류면 입사마을 경로당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제 소멸 위기 앞에서 경로당을 더 경로당답게 만들기 위한 지자체의 노력이 더욱 필요할 때입니다. 비교적 인구가 많은 경로당을 중심으로 짜여지는 각종 여가·돌봄 프로그램을 소규모 경로당으로 더욱 확대하고, 코로나19 등 감염병이 닥쳐와도 시설을 폐쇄하지 않고 운영할 수 있는 대책 마련도 필요해 보입니다. 의료취약지역인 만큼 순회진료와 방문간호 체계를 더욱 촘촘하게 꾸려나가는 것도 필요하고요. 우리사회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인구소멸 위기 지역 어르신들의 여가와 돌봄공백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해봤는지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르신들을 잘 보살피는 마을,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젊은이들에게는 미래의 불안을 덜어주는 일이고, 현재의 어르신들에게는 사는 동안 행복하게 해드리는 일일 겁니다.

    “아이고, 잘 넘어갔다 오늘도.”

    어르신들이 하루를 잘 보내시고 마기꾼들의 퇴근 시간인 오후 6시에 맞춰 경로당을 나오십니다.

    “얼매나(몇번이나) 더 온다꼬? 정이 이제 막 들라 카는데….”

    지역소멸 극복 프로젝트 경남신문 심부름센터 취재 일정이 이제 2주 남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떠나는 마기꾼들의 발걸음이 이날 많이 무겁습니다.

    글= 도영진 기자·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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