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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3부 ⑫ 럭키치약과 하이타이, 그리고…

[3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치약·비누·세제 잇단 출시…‘럭키 신화’를 만들다

  • 기사입력 : 2022-05-06 07:5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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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락희화학공업사 창업 이래 멋지게 성공한 제품이 많이 있다. 락희화학의 대표상품인 럭키치약, 비누, 합성세제 하이타이 등 이와 관련하여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1952년 락희화학공업사는 국내 최초로 사출성형기를 도입했다. 이때 생산된 머리빗은 국무회의 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될 정도로 신기술 제품이었다.
    1952년 락희화학공업사는 국내 최초로 사출성형기를 도입했다. 이때 생산된 머리빗은 국무회의 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될 정도로 신기술 제품이었다.

    # 럭키치약의 탄생 배경

    1950년대 한국의 치약 제조는 동아특수화학의 다키 치약, 계림 화학의 진주 치약 정도가 국내산 고체 치약으로 생산 판매되고 있었다. 하지만 시장에서 가장 판매가 많은 제품은 ‘콜게이트’라는 외국산 제품이었다. 락희화학의 치약 개발 동기는 아주 간단하다. 락희화학의 칫솔 도매상을 하던 상인이 칫솔을 팔면 실과 바늘처럼 치약이 필요한데 왜 만들지 않느냐는 요구에서 치약 개발을 시작했다.

    치약은 매일 조금씩 사용하는 소모품으로 치약 시장 진입 시 수익이 충분하리라 판단했다. 치약은 치아를 닦아주면서 입안의 음식 찌꺼기를 청소하는 것이 주 용도이다. 따라서 입안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체에 해롭지 않은 물질로 만들어야 하는 복잡한 성분의 결합이 필요하다.

    구인회 사장은 치약을 개발하더라도 “버터 먹는 서양사람 치약이 아닌 김치 먹는 한국 사람 기호에 맞는 치약”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한국인의 미각과 촉각에 너무 자극적이지 않고 밋밋하지도 않은 향료를 넣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박하의 일종인 스피아민트향을 첨가해 1955년 9월 ‘럭키치약’을 최초로 출시했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럭키치약./LG홈페이지/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럭키치약./LG홈페이지/

    # 치약 판매 전략

    일반 소비재 제품은 처음 시장 진입 시 판매전략이 필요하다. 구자경 상무의 회고이다.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을 기념하는 산업박람회가 서울 창경원(창경궁)에서 개최됐다. 무료입장이라 박람회 기간 중 수많은 사람이 올 것으로 예상하고 무료로 치약을 나눠주며 홍보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지금이야 무료 시식회 등 이벤트가 많지만 당시에는 아주 특이한 홍보 전략이었다. ‘구자두’는 치약 광고탑을 만들어 시민의 주목을 받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청소년과 여성에게는 컬러칫솔을 개발하여 판매량을 증가시켰다.

    “미제와 꼭 같은 치약, 서울 미도파 백화점, 부산 미화당 백화점에서 판매합니다.” 1957년 1월 1일자 국제신문에 실린 럭키치약 광고이다. 유명한 상품이 되면 이름을 도용하는 업체도 생기게 마련이다. 락희화학은 치약 이름을 ‘럭키치약’, 영문으로 ‘LUCKY’로 상표 등록을 했다.

    변변한 치약 없던 시절 칫솔 도매상 권유로
    구평회의 美치약회사 자료와 연구 끝에
    1955년 한국사람에 맞는 ‘럭키치약’ 개발

    1959년 락희유지공업서 ‘럭키비누’ 생산
    1966년 분말세제 대명사 ‘하이타이’ 나와
    세탁기 개발 맞춰 판매 상승 효과 ‘탄력’

    # 럭키치약 개발의 중심 구평회의 노력

    락희화학이 치약을 만드는데 초기 자료를 수집하는 등 결정적 역할을 한 분이 구인회 6형제중 5섯째인 구평회이다. 당시 락희화학 뉴욕사무소장을 하면서 미국의 치약회사를 모두 다 찾아가 원료, 기계, 기술 등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구인회와 구자경에게 보냈다(구평회는 구자경보다 1살 어린 삼촌이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럭키치약이 탄생했다. 훗날 호남정유회장을 지냈다.

    1950년대 이동용 광고 차량./LG홈페이지/
    1950년대 이동용 광고 차량./LG홈페이지/

    # 럭키비누 생산

    1959년 3월에는 락희유지공업주식회사에서 ‘럭키비누’를 생산했다. 이 시기를 전후로 애경, 동산, 무궁화 등 여러 비누 제조회사가 생기면서 경쟁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1960년 4월에는 무지개, 크로바, 비너스 상표를 가진 화장비누와 세탁비누를 고급화하여 생산했다. 칫솔을 만들었으니 치약을 만들고, 비눗갑을 만들었으니 비누도 만들어 설, 추석 명절 세트 선물로 또 한 번 명성을 날렸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세제용품 하이타이./LG홈페이지/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세제용품 하이타이./LG홈페이지/

    # 허신구 역사 1- 합성세제 하이타이

    ‘안녕 태국’, 세제의 대명사로 불리는 ‘하이타이’의 뜻이다.

    세탁기가 있으면 세제가 있어야 한다. 세제를 말하면 하이타이를 말하고, 하이타이가 있으면 뚝심의 부산 사나이 ‘허신구’가 있다.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통운에 근무하고 있던 허신구를 구인회가 전 직장에 사표도 내기 전에 락희화학에 발령을 낼 정도로 인정을 받은 허만정의 넷째 아들이다.

    1962년 허신구 상무가 동남아 출장을 다녀온 뒤 업무보고를 하였다.

    “태국 방콕의 어느 강가에서 보았는데, 이상한 가루를 물에 섞으니 거품이 많이 나더라. 태국 여성이 거품 난 큰 그릇에 옷을 넣고 씻었는데 옷에 때가 말끔히 빠지는 것을 보았다. 무엇인지 물어보니 합성세제”라 한다.

    당시 한국에서 빨래를 할 때는 양잿물에 끓이고 방망이로 두드리고 비틀어 짜는 재래식이었다. 추운 겨울에 비눗물도 녹지 않아 찬물에 빨래하는 것을 안타까워한 허신구는 태국에서 본 합성세제를 한국에서도 만들어 여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자고 제안했다.

    1966년 4월, 안양공장에서 분말세제 하이타이를 생산했다.

    # 빨래는 쉽게, 옷은 빛나게 - 하이타이 주세요

    럭키제품은 세척력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주부들이 마트나 시장에 가서 “세탁용 합성세제 주세요”가 아닌 그냥 “하이타이 주세요”하면 판매원과 의사소통이 되었다.

    “세제 주세요”가 아닌 “하이타이 주세요”로 상품 이름이 특정용품 대명사가 된 유명한 상품이 되었다. 이 시기 금성사에서는 그 유명한 ‘백조세탁기’가 개발돼 상호보완 제품으로 상승효과가 더 탄력을 받았다. ‘빨래는 쉽게, 옷은 빛나게!’ 1970년대 하이타이 광고문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 허신구의 역사 2-창틀의 대명사 하이샤시

    박창희의 저서 ‘허신구평전’에 소개된 내용이다. 1971년 3월 허신구가 락희화학 사장으로 발령이 났다. 허신구 사장의 두 번째 신화를 만든 제품이 바로 ‘하이샤시 개발’이다. 샤시는 창틀에 이용되는 건축재다. 나무는 강도가 약하고, 철재는 녹이 슬고, 알루미늄은 가공이 쉽고 가볍지만 단열 성능이 약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한꺼번에 해결한 것이 1976년 9월 럭키가 국내 최초로 개발 출시한 폴리염화비닐 창틀 ‘하이샤시’이다. 샤시는 창호재의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하이샤시는 창호제품의 대명사로 불린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주방세제 퐁퐁./LG홈페이지/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주방세제 퐁퐁./LG홈페이지/

    # 이승만 대통령과 락희화학 머릿빗

    락희화학에서 국내 최초 합성수지로 생산한 ‘오리엔탈상표’ 빨간색 플라스틱 빗이 얼마나 인기 있었는가를 추측하는 일화가 있다.

    이재형 상공부 장관이 경무대에서 국무회의를 할 때였다. 플라스틱 빗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내놓으면서 “각하, 이 플라스틱 제품 빗이 우리 기술로 만든 것입니다. 부산에 있는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이 빗을 보고 흐뭇해 하시면서 “이 장관, 그 빗을 나에게도 하나 주시오” 했다. 경무대 국무회의에 락희화학공업사가 플라스틱으로 만든 빗이 그날 회의의 중심이었다. 이 일화는 락희의 자부심을 대신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재형은 제헌의원을 거쳐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상공부 장관을 했다. 그후 7선의 국회의원으로 국회의장까지 했다. 일본 출장 중 호텔방을 구하지 못하자 구인회 회장의 호텔방에서 함께 보낸 인연도 회자되고 있다. 1980년대 말, 대학을 갓 졸업한 필자가 비서로 1년 남짓 함께 생활한 인연이 있다.

    <구인회의 한마디> 사업에는 행운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찾아온 행운을 놓치지 않으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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