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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0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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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동화(銅畵) 명맥 잇는 전통 도예가 김용득 선생

옹기장이 된 열넷 소년, 김해 진례서 50여년 도공 외길

  • 기사입력 : 2022-03-02 20: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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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 추위가 막바지 심술을 부리던 지난달 19일 김해 진례면 신월리에 있는 운당도예에서는 올해 첫 가마불지피기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이웃 주민은 물론 김해와 창원 등에서 수십여명의 사람들이 몰려 가마불지피기를 지켜봤다.

    가마불지피기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지만 외부인을 초대해 시연하는 행사는 대부분 2차 재벌구이 때다. 2차 불지피기 때에 작품의 모습을 띤 유약을 바른 도자기를 입고하는 데다 1차 때에 비해 가마의 온도가 훨씬 높기 때문이다. 소나무향이 가득한 전통 가마에서 내뿜는 1000℃가 넘는 열기와 이글거리며 사방으로 춤을 추는 잉걸불(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이나 장작개비의 불덩어리)꽃을 보고 있노라면 한동안 넋이 나간다.

    운당 김용득 선생이 운당도예 2층 전시실에서 최근 제작한 백자 달항아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운당 김용득 선생이 운당도예 2층 전시실에서 최근 제작한 백자 달항아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날 가마에 들어간 도자기는 50여점이 된다. 그러나 한 달여 가까이 뒤 대부분의 도자기는 폐기 처분되고 주인에게 낙점된 몇 점의 도자기만 온전한 도예작품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도자기가 탄생하기까지는 대략 두 달 가까이 걸린다. 도자기를 빚는 데 한 달이 걸리고 빚은 도자기를 가마에 넣고 1차로 800℃ 내외의 불을 지피고 식히는 데 일주일이 후딱 간다. 이어 유약 등을 바르고 2차로 1300℃ 내외 불을 지피고 식혀 보름이 지나야 온전한 도자기가 나온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지만 모든 과정을 거친 도자기 중 10% 내외만 주인에게 낙점돼 작품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옹기장 외할아버지 보며 도공 꿈 키워
    10대 후반 도예명장 서동규 선생 만나
    도자제작 전 과정 어깨 너머로 배워

    20대 초반 김해로 와 배종태 선생에
    분청사기·등요 불 넣는 법 등 전수받아
    1989년 첫 요장 열고 동화요변 기초 다져

    1992년 운당도예서 동화 연구에 매진
    도자기에 산화동 그림·백자유약 입혀
    전통 장작가마서 구워낸 작품 유명세

    개인전 7차례… 경남 최고장인 선정도
    “내 꿈은 도예부문 道 무형문화재 되고
    아들에 기술 전수해 가업 승계하는 것”

    이날 가마불지피기는 운당도예 주인이자 경상남도 최고장인인 운당 김용득(67) 선생이 시연했다. 운당도예의 가마불지피기가 관심을 끄는 것은 운당 선생이 전통 방식의 장작 가마에 소나무로 불을 때는 데다 그의 대표 작품인 동화요변(銅畵窯變)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운당 선생은 본인 말대로 배운 것은 짧지만 평생을 흙과 도자기와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55년 현재 운당도예 인근인 진례면 송정리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웃에 외가가 있어 자주 놀러 갔었는데 외할아버지와 두 외삼촌이 옹기장이었다. 외가 옆에 옹기 공장이 있다 보니 그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흙과 물레와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는 물레 돌아가는 모습에 흠뼉 빠져 지내던 그때를 돌이켜보면 도공의 길이 무슨 팔자처럼 여겨진다고 말한다.

    운당 선생이 장작 가마에 불을 지피고 있다.
    운당 선생이 장작 가마에 불을 지피고 있다.

    선생은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하다 보니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이웃 부잣집 소꼴머슴으로 들어갔다. 당시 힘들고 서러울 때면 옹기 공장을 찾아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했었는데, 언제적인가부터 소꼴머슴보다 옹기장이가 되면 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래들이 중학교를 가던 14세 때 그는 흙을 다지는 옹기장이가 됐다. 그곳에서 기술 하나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간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가마가 노는 날이면 물레에 앉아 옹기 만드는 연습을 수없이 했다.

    어느날 어머니 따라 김해장에 갔다가 옹기전 한 쪽 옆에서 처음 보는 곱고 아름다운 그릇과 마주쳤다. 도자기였다. 옹기와 비교조차 할 수없는 그것들이 하루 종일 눈에 아른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장날 어머니를 따라 다시 그곳에 갔다. 한참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으니 주인이 작은 도자기 하나를 선물로 줬다. 선생은 그때의 고마운 마음을 기억해 지금도 자신의 요장(도자기를 만들어 구워 내는 시설)을 처음 찾아오는 이에게는 선물로 도자기 소품 한 점을 선물한다.

    연습 삼아 틈만 나면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고 2년여가 흐른 어느날 옹기를 사러 온 어떤 손님이 우연히 그가 만든 도자기(화분)를 발견하고는 마음에 든다며 대량 주문을 해갔다. 이후 주인으로부터 인정받아 수비(흙 거르는 작업)일부터 가마 불 조절까지 열심히 배웠다. 어른들 몰래 멀쩡한 옹기에 그림을 그리든가 모양을 새기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남은 흙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항아리를 만들어 문양을 새겨 구워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솜씨가 좋았는지 잘 팔리자 예쁜 도자기는 무조건 팔린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됐다.

    도공의 꿈을 한참 키워가고 있던 그는 10대 후반 충북 단양에서 대한민국 도예명장인 방곡 서동규 선생을 몇 년간 모시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질흙 파오기, 수비, 수비된 진흙 반죽과 기포 빼기, 꼬막(물레에 올릴 질흙 뭉치) 만들기, 물메질(성형된 그릇의 홈을 닦는 일), 유약 바르기 등 도자 제작 과정상 허드렛일은 물론 자기 성형기술, 장작 가마 번조 기술 등 도자 제작의 전 과정을 어깨 너머로 배우게 된다.

    그는 이후 20대 초반에 김해로 내려와 토광도예에서 종산 배종태 선생에게서 분청사기 제작기법을 배운다. 종산 선생은 전통방식으로 장작 가마를 만들어 기술을 보급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이로, 그는 종산 선생으로부터 도자기 수비하기와 꼬막 만들기를 완전히 체득했으며 등요(登窯)에 처음 불을 넣는 방법도 배웠다.

    이어 인근의 분성도예로 옮겨 백자항아리의 성형과 수비를 익혔다. 그때 백자항아리에 목단과 장미를 아름답게 구워내기 위해 서울에서 동화(銅畵) 유약을 가져온 것이 그의 대표 작품인 동화요변의 시초가 됐다. 하얀 항아리에 진홍빛의 목단이 그를 사로잡으면서 동화를 이용해 도자기를 만든다면 한국 최고 도공의 꿈을 이룰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동화는 유약 배합도 까다롭지만 동(銅)이 고온에서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구워내도 명품을 만나기가 어렵다. 때문에 밤낮으로 연구를 통해 동화유약을 제조하는 기술을 습득했다.

    운당 선생의 대표작 동화요변 달항아리.
    운당 선생의 대표작 동화요변 달항아리.

    이후 김해요업에서 수비, 유약, 성형, 가마불때기 등 요장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터득한 선생은 자신의 요장을 갖기 위해 준비를 시작한다. 흙을 배합하는 방법을 다른 도공들과 다르게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물론 특히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동화와 철화의 유약 데이터를 확실히 축적해나갔다.

    자신의 요장 설립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 그의 나이 35세 되던 1989년이 돼서야 진례에 금지(金池)도예라는 요장을 열었다. 하지만 이름 탓인지 금지도예는 세 번이나 불이 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동화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지금의 동화요변의 기초를 탄탄히 다진다.

    선생은 1992년 금지도예를 버리고 현재의 터로 요장을 옮겼다. 당호도 용득(龍得)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용이 승천하기 전 연못 속에 구름과 논다’는 뜻의 운당(雲塘)으로 지었다. 짓고 보니 동화요변의 오색찬란한 빛깔과 궁합이 맞았다. 운당도예도 처음부터 잘 되지는 않았다. 1년여 동안 열 번 이상 실패를 한 뒤에야 제대로 된 동화 도자를 건질 수 있었다. 동화는 도자기 바탕에 산화동 채료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한 뒤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산화동 채료가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자기다. 참고로 보통 진사(辰砂)로 많이 알고 있는데, 이는 일본식 표기다.

    운당도예는 1995년부터 원하는 빛깔의 동화요변 작품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다. 그의 대표작 동화요변의 특징은 붉은색과 비취색의 오묘한 조화에 있다. 환원염과 산화염만으로 연출한 그의 작품은 불의 역동성과 붉은색의 품위, 비취색의 고귀함이 함께 묻어난다. 또 불자락으로 인한 오색(붉은색, 비취색, 흰색, 노란색, 검은색)의 조화가 보는 사람에 따라 신묘한 기운도 느끼게 한다.

    14세 때 옹기장이부터 시작한 선생은 우리나이로 41세 되던 1995년 부산에서 제1회 운당도예전을 열면서 세상에 그의 이름과 그의 대표작인 동화요변을 알리게 된다. 이후 2017년까지 김해와 창원, 부산, 대구, 서울에서 7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올해도 창원에서 제8회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다. 동화요변의 작품성이 인정받으면서 2008년 문화예술분야 우수 신지식인 지정에 이어 2009년에는 경상남도 최고장인에 선정됐다.

    선생의 꿈은 두 가지다. 첫째는 도예부문 경상남도 무형문화재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아들(42)에게 그가 50년 이상 몸으로 터득해 정립한 기술을 전수해 가업을 승계하는 것이다. 운당도예를 빠져나오는 길, 한동안 동화요변의 신묘한 색깔이 아른거렸다.

    글·사진= 이종구 기자 jg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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