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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기자의 판읽기 (11·끝) STX엔진 납품사기 1심 판결문

안전 속이고 양심 팔았지만… 대표는 무죄, 직원은 유죄

  • 기사입력 : 2022-02-22 21: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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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7일 오전 10시 창원지방법원 315호 법정. 어떤 한 사건에 대한 1심 재판부의 선고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양형 이유를 10여 분간 설명하던 재판장이 주문(판결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자 가득 들어찬 방청석에선 엇갈린 반응이 곳곳에서 새어나왔습니다. 허탈한 듯 낮은 숨을 내뱉는 한쪽과 옆 사람의 손을 꼬옥 잡고는 안도하는 또 다른 쪽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어떤 이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몸을 들썩이며 깊은 숨을 몰아쉬기도 했고요. 방청석에 함께 있었던 저와 다른 기자는 “헉! 이게 무죄가 나온다고?”라며 나지막이 속삭였습니다.

    어떤 판결이었을까요? 비상용 발전차 제품 시험성적서를 조작·제출해 한국수력원자력으로부터 불법으로 수주를 받은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로 재판에 넘겨진 송종근(57) 전 STX엔진 대표이사와 부사장을 지낸 고문, 해당 사업 본부장을 지낸 고문, 팀장, 차장 등 총 5명에 대한 1심 선고였습니다. STX엔진은 창원산단 내 디젤엔진을 생산하는 방산기업입니다.

    왜 방청석의 반응은 엇갈렸을까요? 우선 1심 선고부터 보겠습니다.


    창원지방법원 제4형사부(재판장 장유진 부장판사)는 송 전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전 부사장, 팀장, 전 본부장에 대해서는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차장에 대해서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내렸습니다.

    간단히 말해 ‘대표 무죄’, ‘임직원 유죄’군요.

    이 사건은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이 있기 전인 지난 2020년 창원지방검찰청 기업·공공수사전담부가 한국수력원자력의 고소로 직접 수사했던 고소사건입니다.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이들은 한국수력원자력㈜이 발주한 원자력발전소 비상용 발전차를 납품하는 과정에서 시험성적서를 조작해 발전차 대금 명목으로 약 66억원을 가로챈 혐의가 수사에서 드러났습니다.

    비상용 발전차는 한국수력원자력이 비상시 원전에 대한 전력공급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4개 원자력 본부(고리·새울·월성·한빛)에 도입하는 제품인데요. 말 그대로 비상 상황에 전기를 공급하는 차입니다. 벌써 11년이 지났군요. 지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시 지진과 쓰나미로 냉각로 등에 전기공급이 끊겨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도입하게 됐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시 전력공급 체계 복구 시까지 7일이 걸린 점을 고려해서 원자력안전기술원은 ‘168시간 연속운전시험’을 발전차 성능조건으로 요구했습니다.

    STX엔진이 지난 2019년 10월 이 계약을 따냈습니다. 4대를 납품하기로 했군요. 당연히도 168시간 연속운전이 가능한 성능을 갖춰야 하고 이를 보증하기 위한 게 바로 ‘시험성적서’인데, 이걸 제출하기로 기술규격서에 반영했습니다. STX엔진은 실무 협의 과정에서 고리 원전 납품용 1대에 대해서만 성능시험을 해 성공할 경우 4대 전부를 납품하기로 하고 4대 중 2대 가격에 해당하는 66억원을 그 무렵 선금으로 지급받았습니다.

    이제 연속운전 시험을 통과하는 게 목표겠군요. 연속운전 시험 중 엔진이 정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해 12월 연속운전 시험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엔진이 6차례나 멈췄습니다. 그러나 재판에 넘겨진 임직원들은 이를 알면서도 시험성적서를 조작한 게 드러나 1년 뒤인 2020년 12월에 송 전 대표와 부사장을 지낸 고문, 팀장은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고 나머지 2명은 불구속 기소됐었습니다. 단순하게 요약하면 실패했고, 실패 사실을 은폐해 돈을 가로챈 혐의입니다.

    비상용 발전차, 시험 중 6차례 멈추고도
    시험성적서 은폐·조작해 66억원 가로채
    송종근 전 대표 1심서 무죄, 임직원 유죄

    재판부 “보고 받고 승인 취지 발언했어도
    대표 범행 공모 사실 인정 어렵다” 판단
    변호사 “안건 안 읽어 몰랐다는 건 변명
    재판부가 면죄부 준 것이나 다름 없어”

    사안이 중대했던 터라 피의사실공표에 민감했던 당시 검찰도 보도자료를 통해 기소 내용을 언론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인데다 수사 결과에도 자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 당시 창원지방법원 홍득관 영장전담 부장판사도 송 대표·부사장을 지낸 고문은 증거인멸의 염려가, 팀장은 도망의 염려가 있다고 각각 판단해 구속영장을 발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소 후 재판을 거쳐 1심에서는 왜 의사결정 총책임자인 대표는 무죄, 나머지 임직원들은 유죄가 나왔을까요?

    판결문 분량이 상당히 많아 압축에 압축을 거쳐 송 전 대표의 무죄 부분만을 살펴보겠습니다.

    재판부는 송 전 대표의 무죄 이유에 대해 전체 판결문 36페이지 중 8페이지 넘게 할애해 설명했습니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송 전 대표는 “보고는 받았지만 사실 은폐에 관여한 바 없다”는 취지로 검찰의 공소사실을 일관되게 부인해왔습니다.

    검찰은 공소사실에서 송 전 대표가 다른 피고인들과 공모했다는 부분을 설명하는데요, 엔진 정지 사실 등을 보고한 부분과 실무진의 의견을 전달하자 송 전 대표가 ‘알았다’라고 말해 이를 승인한 부분이 해당된다는 겁니다.

    수사 당시 담당 본부장이 팀장과 함께 송 전 대표에 보고했으나 송 전 대표로부터 ‘부사장과 의논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한 부분도 있는데요. 재판부는 이에 대해서도 “실무진의 의견을 승인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부사장과 의논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므로 이것만으로는 송 전 대표가 범행을 공모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내렸습니다.

    재판부는 또 부사장을 지낸 고문의 검찰 피의자 신문, 법정 증언에서 보고하고 승인받았다는 취지로 말하는 부분에 대해 “(당시 상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취지의) 먼저 이루어진 진술보다 나중에 이루어진 진술(퇴근 무렵 송 전 대표에게 실무진의 의견을 전달하고 송 전 대표로부터 승인을 받았다)이 더 정확할 가능성은 경험칙상 낮다고 판단되는 점 등의 여러 사정을 고려해 송 전 대표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는 취지의 최근 진술은 쉽게 믿기 어렵다”고도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설령 송 전 대표가 보고받고 승인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하더라도 ‘공모관계 편입 및 사기의 고의를 인정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고도 설명하는데요. 송 전 대표는 퇴근 무렵 짧은 시간 내에 압축된 내용을 말로 보고받고 그 자리에서 실무진의 의견을 승인했는데, 송 전 대표 입장에서 봤을 때 그 방식의 승인이 사기 범행을 인식하고 용인했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또 “임원회의 자료에 ‘2차 연속운전 시험 완료, 비상용 발전차 판매완료’라는 취지가 기재돼 있긴 하다. 이에 대해 피고인은 임원회의 자료를 꼼꼼하게 읽지는 않기 때문에 기재 사실 자체를 몰랐다고 주장한다. 피고인의 주장을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려우나, 설령 피고인이 위 문구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임원회의에서 해당 주제에 관해 논의가 이루어진 적은 없는 점, 실무자로부터 별도의 추가 보고를 받거나 정보를 제공받지는 않은 점, (중략) 등에 비춰보면, 이러한 사정만으로는 송 전 대표에게 과실이 있음을 넘어 사기의 고의가 있고 다른 피고인들과 공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표는 무죄, 임직원들은 유죄인 ‘비상용 발전차 납품 사기 사건’을 들여다봤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저는 선고 결과를 듣고 허탈한 듯 낮은 숨을 내뱉았던 어떤 이의 심정이 어땠을까, 깊이 한숨을 몰아쉬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국민의 안전이 걸려 있는 대형 계약을 속여 납품해 걸렸는데, 대표가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 무죄의 중요 근거가 된다는 게 쉬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익명을 요청한 경남지역 한 변호사는 대표의 무죄에 대해 “봐줘도 너무 봐줬다”고 일갈하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보고를 받고 제대로 몰랐다, 회의 안건 제대로 읽지 않아서 몰랐다는 건 변명이다. 공모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내린 건 재판부가 면죄부를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이 납품사기를 아무도 몰랐고, 만에 하나 만일의 사태가 생겨 이 발전차가 사용됐다면 어땠을까? 범행 이후 피해회복이 어느 정도 이뤄진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판결은 법률가로서 납득하기 어렵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선 화난다. 다른 실무진들에게도 집행유예를 내린 것도 솜방망이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리즈를 마치며= 이상으로 11번째이자 마지막인 도 기자의 판읽기(판결문 읽어주는 기자)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마지막편 법률 자문을 해주신 변호사님과 앞선 10편에서 자문해주신 경남지방변호사회 조아라·오근영·강정은 변호사님, 그리고 창원지방법원 양철순 전 공보판사님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정의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정의로운 판결은 무엇일까요? 늘 이 고민을 하며 판결해주시길 바라는 마음도 대한민국의 모든 판사님들에게 전합니다.

    도영진 기자 doror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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