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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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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⑧ 조홍제, 선비보다 상인의 길을 가다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애국 신념 지키며 일본 감시 벗어나려 주식회사 경영

  • 기사입력 : 2021-12-23 21: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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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제 아재, 이것 좀 봐주이소, 우리 논 측량이 잘못되었는데 쌀 수확량을 더 달라고 합니더.”

    “홍제 아우, 우리집 애가 서울 중등학교에 입학하려는데 어떻게 해야 하노.”

    마을에 어떤 일이라도 생기면 주민들은 경제학을 전공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조홍제를 찾았다. 주민들의 금융, 농토, 교육 문제 등을 상담하다 보니 주민들의 권유로 마을 조합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조홍제는 1936년부터 해방되던 시기까지 임기 3년의 군북금융조합장에 세 번이나 당선되어 9년간 재직하였다. 조홍제는 조합장 재직 중에도 반일 저항 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합원의 농지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일본인의 손에 넘기지 않는다는 기준을 가지고 일 처리를 하였다. 군민들에게는 칭송을, 일본인 관리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조홍제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였고, 일본인 지인도 많아 마음만 먹으면 일본 편에 서서 얼마든지 출세할 방법이 많았다. 그러나 조홍제의 생각은 언제나 일본에 협조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주민들의 금융·농토·교육문제 상담하다
    마을조합장 출마해 해방까지 9년간 재직
    일본 관료들 식민지정책·전쟁 수행 위해
    어용단체 지도자 요청했지만 잇단 거절

    일본 요시찰 인물되며 수시로 괴롭힘 당해
    감시 피하려 사업 찾다 군북산업조합 인수
    군북산업주식회사로 바꾸고 흑자 경영
    세상 흐름·인력·물품관리 경험 훗날 도움

    조홍제의 고향 함안군 전경. 옛 아라가야의 도읍지로 말이산 고분군, 왕궁터 등 고대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함안군/
    조홍제의 고향 함안군 전경. 옛 아라가야의 도읍지로 말이산 고분군, 왕궁터 등 고대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함안군/

    # 흔들림 없는 애국 신념

    조홍제가 조합장이자 지역 유지로 마을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자 일본 관료들은 이 고장에서 가장 신망이 있으니 면장이 되어주길 요청하였다. 금융조합일과 장손으로 집안일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였지만 일본 관료들은 “비상근인 의용소방대장을 맡아 달라”고 하는 등 끊임없이 일본 식민지 정책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어용단체의 지도자 요청을 하였다.

    일본 관료들의 요청에 몇 번이나 거절했더니 결국은 조홍제를 요시찰 인물로 지정하였다. 경상남도 당국의 고등계 형사들이 수시로 조홍제를 찾아와 비협력하는 것에 시비를 걸고 꼬투리라도 잡으려고 괴롭혔다.

    일본의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일본의 통치는 갈수록 극에 달하여 조홍제도 계속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등계 형사들의 불시 방문도 피하고 또 할 만한 사업을 찾아보고자 진주, 대구 등 큰 도시에 가 보았지만 일본의 통제 전시상황에서 할 만한 사업을 찾지 못하였다.

    조홍제가 군북면 금융조합장에 당선된 1940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
    조홍제가 군북면 금융조합장에 당선된 1940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
    자력갱생을 내세운 1930년대 금융조합 포스터.
    자력갱생을 내세운 1930년대 금융조합 포스터.

    # 군북산업주식회사 경영

    군북산업조합은 농업협동조합의 금융 업무를 제외한 업무를 취급하는데 도정 작업인 정미업과 판매업, 문화 업무 관련 일을 하는 조합이다. 군북산업조합이 경영의 어려움으로 인수자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홍제가 인수하여 명의를 변경하고 이름도 ‘군북산업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이렇게 회사를 차리고 상근하여 일을 하니 일본 관료도 더 이상 단체장의 요청을 하지 않았고, 고등계 형사의 요시찰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군북산업 주식회사 경영은 일본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지 이 회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금 3만4000원이 투입되고 직원 월급도 줘야 하기 때문에 도정 작업 외 가마니 제작, 새끼 꼬기, 비료 취급 등으로 큰 수입은 아니지만 해방까지 무난하게 흑자 경영을 유지하였다.

    조홍제는 처음으로 회사 경영을 통하여 세상의 흐름과 인력 관리, 물품 관리 등 많은 경험을 쌓게 되었고, 훗날 사업할 때 이 때의 경험이 큰 보탬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더 기쁜 것은 이 일로 인하여 민족 반역자나 일제 협력자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은 게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경제학자들은 조홍제의 군북산업 주식회사를 첫 사업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취재와 자료 분석을 해 볼 때 당시 군북산업의 경영은 농업협동조합 위탁 업무 수행이 많아 조홍제의 직접적인 경영 회사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해방 후 공동 경영한 철가공업체 ‘육일공작소’ 경영을 첫 사업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는 판단이다.

    함안 군북면사무소 옆에 세워진 조홍제 송덕비. 조홍제는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부분이 많음에도 국민들에게 덜 알려져 있다./이래호/
    함안 군북면사무소 옆에 세워진 조홍제 송덕비. 조홍제는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부분이 많음에도 국민들에게 덜 알려져 있다./이래호/

    # 효성, 작명의 배경에는

    효성, 삼성, LG(금성) 그룹 이름에는 우연의 일치이지만 ‘별’ 이름이 들어가 있다. 조홍제는 유학 시절 가슴에 새겨온 동방의 별(東方明星)이 되자는 좌우명을 토대로 회사의 이름으로 정하였다. 구인회는 영어 골드스타(GOLD STAR)를 한자어로 금성(金星) 표기를 한 것이 회사명이 되었다. 이병철은 3이라는 숫자가 뜻하는 안정과 완벽의 의미에, 별처럼 더없이 빛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삼성이라 하였다.

    효성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을까? 이병철 회장과의 동업 관계를 청산한 조홍제가 1962년 9월 15일 첫 사업을 추진한 주력 회사 이름은 ‘효성물산’이었다. 효성이라는 사명이 이때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1957년 조홍제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에 근무할 당시 정부의 달러 공매에 참여하기 위해 조홍제 이름으로 ‘효성물산’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가지고 있었다. 정부 입찰에 몇 번 참가한 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삼성그룹과 결별하고 독자 사업을 할 때 본인 명의의 회사를 그대로 가져와 ‘효성물산 주식회사’로 시작하였다.

    효성그룹 산하 계열사에 ‘동(東)’자나 ‘성(星)’자가 많이 들어 있다. 조홍제는 어려서부터 별을 좋아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자취생 숙소 이름을 동성사(東星舍)로 하였다. 동성은 민족의 앞날을 밝게 비추는 동방의 별을 의미한다. 민족의 앞날을 밝게 비출 동방명성(東方明星)을 꿈꾸어 온 조홍제는 동양의 별이 되고자 ‘동성(東星)’이라는 이름을 생각했다. 이 이름을 가지고 ‘동성물산 주식회사’라는 법인 설립을 위해 등기를 하러 갔지만 ‘동성’이라는 법인 이름은 이미 등록돼 있었다. 당시에도 법인 이름이 동일하면 그 상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동방명성은 샛별이란 뜻이고, 샛별은 새벽 동쪽 하늘에 매우 밝게 보이는 별로, 금성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다. 또한 매우 귀한 존재라는 의미로도 비유된다. 조홍제는 동방명성의 의미를 ‘금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금성으로 등록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금성은 구인회가 경영하는 ‘락희화학’ 계열사에서 이름을 먼저 사용하고 있어 사용할 수 없었다. 금성의 다른 이름 ‘계명’으로 등록된 기업도 있었다. 그러나 샛별의 또 다른 별 이름 ‘효성’이란 이름으로 등록된 회사는 없었다. 이러한 과정 끝에 조홍제는 첫 무역회사 등록 이름을 ‘효성물산주식회사’로 한 것이다.

    효성, 삼성, LG(금성)의 회사 작명에 별이 들어간 것은 우연의 결과이지 약속된 것은 아니다.


    <조홍제의 한마디> 행운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행운에 접할 수 있는 노력과 신념을 바탕으로 한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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