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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5월 2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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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빈 들의 저녁- 이재훈

  • 기사입력 : 2021-12-23 0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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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자 남을 때가 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도 없이

    두려운 가난만 남아 저물 때가 있다.

    무리를 떠나 빈방에 돌아와

    두부 한 조각에 막걸리를 들이켤 때.

    빈속에 피가 돌고 몸이 뜨거워질 때.

    문득 빈 것들이 예쁘게 보일 때가 있다.

    조금 더 편하기 위해 빚을 지고

    조금 더 남기기 위해 어지러운 곳을 기웃거렸다.

    가진 것 다 털고 뿌리까지 뽑아내고

    빈 들이 된 몸.

    빈 몸에 해가 저물고 잠자리가 날고

    메뚜기가 뛰어다닐 때.

    아름다운 것을 조금쯤 알게 되었다.

    들에 앉아 남은 두부 한 덩이 놓고

    저무는 해를 볼 때.

    세상의 온갖 빈 것들이 얼마나 평온한지.

    얼마나 아름답게 우는지.

    서로 자랑하듯 속을 비워내고 있다.


    ☞ 풍요를 알기 전에 이미 빈 들의 저녁을 경험한 시인이 있다. 늙어가면서 느끼는 것과는 분명 결이 다른, 말 그대로 두려운 가난과 마주할 때이다. “문득 빈 것들이 예쁘게 보일 때가 있다”는 아름다운 고백을 하지만, 그래서 그는 타고난 시인이겠지만 “기었다/ 울었다/다시 기었다”로 시작하는 그의 ‘아직 사십대’ 라는 시에서는 좀 더 처절하고 적나라하다.

    사회 동력의 중심부인 40대들의 안간힘을 생각하게 된다. 몸담은 각 분야에 뿌리를 내리고 생활의 안정이 다져질 시기에 “가진 것 다 털고 뿌리까지 뽑아내고/ 빈 들이 된 몸”이라니…

    힘든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비록 팍팍한 삶이 또다시 반복되어도 아직은 그대들의 젊음으로 새해는 뜨겁게 밝아올 것이다. 빈 들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울음! 그들의 “터질 듯 뛰는 심장 소리가 환하다” 유희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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