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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글은 언제부터 공공언어가 되었을까- 김덕현(한글학회경남지회 회장)

  • 기사입력 : 2021-10-05 21:3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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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한글날은 대체 공휴일과 연결되어 연휴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이렇듯 한글날의 공휴일 지정이 국경일과 〈공휴일에 관한 법률〉에 따른 행정 행위라면, 한글은 언제부터 국가의 공공언어가 되었을까? 공공언어란 정부 및 공공 기관에서, 사회 구성원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공공성을 띤 언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세종께서 1446년 온 겨레 앞에 내놓으신 한글(훈민정음)은 당시 공공언어였을까? 거대한 중화 체제와 기득 권력을 등에 업고 즉각적인 반대를 한 최만리 일파의 주장이 보여주듯 문자로서 인정조차 받기 어려웠다. 세종의 확고한 철학과 천재적인 전문성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글은 없었다. 그후 한글은 왕가의 보호 아래 잠깐의 기간을 보내다가, 연산군 때의 모진 서리까지 맞으며 수백년 동안 긴 겨울잠을 자게 된다. 이 시기 한글은 민중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암글’이란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여성들이 한글의 맥을 이어온 셈이다.

    19세기 말, 겨울잠을 자고 있던 한글도 민중과 함께 잠을 깨기 시작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한문으로만 써 오던 공용문서에 한글 섞어쓰기가 일부 허용되었다. 주시경 선생께서 ‘언문’, ‘암글’이란 이름 대신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1910년초 〈국어문법〉 책을 내기도 하였으나, 그해 8월 경술국치로 인해 공공언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토록 기다린 해방을 맞았으나 우리말을 한글로 적자는 자주세력과 일본 한자말을 강점기 때처럼 한자로 적자는 식민지 지식인 세력 사이에서 언어정책은 갈팡질팡 흔들렸다. 미 군정기였던 1948년 공포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도 힘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대통령령으로 ‘모든 문서는 한글을 전용하고 한자가 든 서류는 접수하지 말라고 했다(한글전용촉진 7개 사항)’. 이 법률로 인해 한글이 비로소 공공언어로써 작동할 수 있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대신,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통해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과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국어기본법〉을 만들었다. 공공기관마다 ‘국어책임관’을 지정하고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공공언어로서 한글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한글이 창제된 지 600여년이지만 공공언어로서 인정받은 시기는 지극히 짧다. 〈국어기본법〉도 구속 조항이 적어 활동이 부진하였다. 심지어 기관별 ‘국어책임관’의 역할조차도 잊고 있었다. 이에 한글단체와 지역 언론이 힘을 합쳐 이름뿐인 〈국어기본법〉 바로 세우기 활동에 힘썼고, 뜻있는 의원들께서 주도하여 최근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관련 조례 제·개정이 일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어려운 한자어, 영어, 일본어식 공공언어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 말글의 오염은 날로 심각해지고 시민들 사이 소통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탄소년단 등으로 대표되는 한류 열풍이 뜨겁다. 그 중심에 우리말과 한글이 있다고 본다. 한글의 가치는 경제적 환산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최근 〈국어기본법〉에 따른 관련 조례 제정을 통해 공공기관의 책무를 인식하고, 국어 문화창조에 앞장선 분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김덕현 (한글학회경남지회 회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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