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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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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후보님, 고향이 어디요?- 이상권(서울본부장)

  • 기사입력 : 2021-09-14 2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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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유의 재치와 구수한 입담으로 정평이 난 박희태 전 국회의장 일화다. 2008년 8월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은 광주광역시에서 정책협의회를 가졌다. 박희태 당 대표는 “몇 년 전 당 최고위원에 출마해 광주에 왔었다. 다른 후보들은 광주가 처가다, 공무원 할 때 근무했다, 심지어 사돈이 있다는 등 온갖 연고를 내세워 환심을 사려 했다. 저는 내세울 게 없었다. 그래서 ‘광주에서 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모두 의아해했다. 광주 보병학교 출신이라고 했더니 ‘아이고! 더 들을 필요도 없다. 여기 와서 소주나 한잔하자’고 해서 표를 얻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1961년 고등고시에 합격한 뒤 군법무관이 되기 전 군사교육을 받던 40여 년 전 육군 보병학교 시절을 연결고리 삼은 기지 발휘다.

    혈연·지연·학연을 ‘망국병’이라고 깎아내리지만 무의식에 내재한 관계설정 가늠자다. 특히 선거 때 지역별 투표 성향은 핵심변수로 작용한다. 지역 연고를 앞세운 혈연 마케팅은 집단연대 의식으로 발현한다. 오죽하면 정치판에 ‘연고(緣故)는 현찰’이라는 말까지 있다. 표심을 자극하는 데 단연 으뜸이란 얘기다. 경남 출신 대권 주자는 민주당 김두관(남해)·국민의힘 홍준표(창녕)·최재형(진해)·장기표(김해) 후보 등 4명이다. 두 번째 도전에 나선 경남지사 출신 홍준표 후보는 최근 상승세에 힘입어 ‘경남 대망론’ 군불을 지피고 있다. 그는 지난 대선 때 경남에선 문재인 대통령을 이겼다. 홍준표 79만491표(37.24%), 문재인 77만9731표(36.73%)를 각각 얻었다. 창녕에서 대구로 이사해 초·중·고교를 다닌 데다 지역구(대구 수성을) 국회의원인 만큼 PK(부산·경남)와 TK(대구·경북)에서 고른 지지를 내심 기대한다. 지난 10일 대구 방문 때 “저를 낳아준 고향이 창녕이라면 TK는 키워준 고향이다”고 했다. 홍 후보 처가는 전북 부안이다. ‘호남의 사위’를 내세울 ‘비장의 카드’도 쥔 셈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500년 조상의 고향인 충청의 피를 타고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부친이 충남 공주 출신이다. 지역에선 ‘충청 대망론’이 꿈틀댄다. 윤 후보 외가는 강원도 강릉이다. 학창 시절 방학 때마다 외가를 찾았다가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과 친구가 됐다. 그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얼마 전 모교인 충암고를 찾았다. 올해 청룡기 고교야구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을 격려하며 유니폼을 입고 함께 내달렸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경북 안동 출신이다. 역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는 대구·경북이 취약지다. 하지만 이 후보는 지역 연고를 기반으로 반전을 기대하는 눈치다. 지난 11일 대구·경북 경선 합동연설회에서 “46년 전 비 내리던 겨울날 고향을 떠났던 화전민의 아들, 코찔찔이라고 놀림받던 가난한 소년이 집권당의 1위 후보가 돼 돌아왔다”고 감성을 파고들었다. 이 후보 부인 김혜경 씨는 충북 충주 출신이다. 윤석열의 ‘충청 대망론’에 맞설 패다.

    좁은 땅덩어리에 연고가 얽히고설키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데도 선거철만 되면 똬리를 트는 특정 지역 대망론은 한국 정치의 현주소이자 한계다. 애면글면 정치 공학적 ‘고향 팔이’에 몰두하면서도 정작 지역이 처한 참담한 현실엔 무심하다. 얼마 전 감사원 ‘인구구조 변화 대응 실태’ 보고서는 2047년 전국 시·군·구를 소멸 위험 지역으로 분류했다. “후보님, 고향이 어디요? 머지않아 사라지게 생겼소.”

    이상권(서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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