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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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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어머니- 손봉출(창녕 영산초등학교 교감)

  • 기사입력 : 2021-03-28 2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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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는 안 계시고 쪽지 하나만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 손으로 대충 찢은 듯한 쪽지엔 암호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모용’

    이게 뭔가 싶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빵 터지고 말았다. 목욕하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목욕’이란 두 글자를 쓰려다가 암호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곧이어 들어온 아내에게 이 쪽지를 내밀자 금방 알아채고는 배를 잡고 웃는다. 어머니는 어릴 땐 가난해서, 커서는 바빠서 배우지 못했다는 글자를 여든이 되어서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큰딸이 처음 아빠라고 불러주었을 때보다 더 기분이 묘해서 웃프다는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된다.

    어린 딸들이 글자를 익힐 때 함께 배워보라고 할 때는 늙어서 쓸모가 없다고 관심도 안 보이더니 경로당을 다니던 중에 마음이 바뀐 것이다. 진작에 배웠으면 좋았을 걸 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모습을 볼 때면 자식인 내가 교사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숫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시계나 달력은 곧잘 읽는다. 기억력이 좋아서 자식들 생일은 물론이고 이웃집 제삿날까지 다 기억한다. 어떤 방법을 쓰는지 모르겠으나 쉬워 보이는 양력보다 음력을 더 잘 알고 계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산 세월이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니 효자인 줄 알겠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어머니가 아들인 나를 모시고 산 듯하다. 나와 아내가 출근하면 두 딸을 어린이집으로 태워 보내고 다시 데려와 돌보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집안일은 아내가, 딸들은 어머니가 돌보니 자식을 키우면서도 나만 편했던 것 같다.

    키워주고 놀아준 할머니가 고마웠던지 큰딸은 학교에서 ‘할머니’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상을 받았다. 동생은 언니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듯 글자까지 가르쳐주며 할머니와 놀아준다.

    어머니는 이젠 기력이 약해져 글자 공부는커녕 텔레비전을 보는 것조차 어지럽다며 힘들어한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 그냥 몸이 얄궂다고만 한다. 그럼에도 고집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서 당할 자가 없다.

    이런 어머니를 지켜보는 내 마음이 얄궂다.

    손봉출(창녕 영산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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