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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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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산에서 깨닫게 된 인생의 비밀- 최정은(김해문화재단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관장)

  • 기사입력 : 2020-11-16 21:4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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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던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이런저런 고민들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십년 전쯤 나도 비슷한 생각들로 고통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예술과 철학에 대한 열정만으로 호기있게 대학원에 입학해 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고, 도서관에서 책 읽는 시간을 가장 행복해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박사 학위를 받고도 제대로 된 직장을 못 구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당장 다음 학기에 강의를 맡게 될지 알 수 없는 시간 강사의 현실을 직접 겪으면서 나의 호기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긴 터널 속 어디쯤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출구가 있을까, 출구로 나가는 것보다는 다시 입구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갈 수도 뒤돌아 나갈 수도 없이 터널 속에서 꼼짝할 수 없던 시간, 학업을 포기하고 더 늦기 전에 어디에라도 취직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늘 흔들림 없이 수도승과도 같은 학문정진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한 선배가 내 고민을 듣더니 갑자기 뜬금없이 주말에 산에나 가보자고 했다. 주말마다 산을 타는 대학원 선후배들 사이에 끼어 얼떨결에 따라나서긴 했지만, 평소 등산 훈련이 전혀 안되어 있던 나는 숨이 턱턱 막히고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내내 앞 사람에게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산을 올랐다. 도대체 선배는 왜 나를 여기에 데려온 걸까, 아마도 공부에 게으름을 피우는 후배를 혼내주려는 심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으로 데려온 거라면 어느 정도는 성공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산을 오르는 게 너무 힘드니 연구실에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는 게 얼마나 편한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산행 내내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어디가 어딘지 짐작도 할 수 없고 이 여정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가 없다는 답답함이었다. 산은 가도 가도 그 정상이 어딘지, 얼마나 올라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 전체적인 산세를 도통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기진맥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를 끌고 선배는 빙긋이 웃으며 나무 사이를 헤치면서 몇 걸음 올라갔다. 갑자기 눈앞에 산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보였다. 내 입에선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고 힘든 산행의 고통스런 기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절대로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산 전체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정말이지 나는 마치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지난한 고통의 여정 끝에 갑자기 눈앞에 펼쳐졌던 그 장관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일 속에서 헤맬 때마다 그날의 장관을 떠올린다. 이제 그 풍경은 내게 힘든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떠올리는 주문 같은 것이 되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 한동안은 종잡을 수 없이 혼란스럽고, 결승점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이며 도무지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불안하고 갑갑한 시간을 견디면서 방향을 잃지 않고 묵묵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다 보면, 어느 한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때가 온다.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결승점까지 가는 그 길에서 마음속 불안과 근심과 싸우며 그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결승점에 반드시 도달하게 된다. 결승점에 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우리 마음 속 번민 때문에 가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엔 단풍든 산에 후배를 데리고 가봐야겠다.

    최정은(김해문화재단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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