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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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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인덕(人德)- 원순련(미래융합평생교육연구소 대표·교육학박사)

  • 기사입력 : 2020-09-28 20: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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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이다. 장마와 태풍을 용케도 피해 저렇게 누런 황금빛 들판을 만들어 준 자연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마음이 넉넉해진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농촌에서는 지금 이 시기가 제일 배고픈 계절이다. 들판엔 벼가 익어 가지만 거두어들이기 전까진 쌀독이 비어 있는 시기임을 농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할아버지의 생신이 팔월 스무사흘이다. 온 가족이 모여 잔치를 하고 나면 어머님은 꼭 미역 두 올을 살짝 제켜두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면 돌아오는 둘째 딸의 생일에 남겨두었던 미역으로 생일국을 끓여주셨다. 생일날 아침, 뚝배기에다 미역 두어 올과 멸치 서너 마리를 넣고 간장과 물을 부은 후 그 뚝배기를 무쇠 밥솥에 살짝 얹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셨다. 밥 냄새가 나면 할아버지 밥을 담기 전, 보리쌀이 섞이지 않는 쌀밥 한 그릇을 담았다. 그리고 밥솥에서 쪄낸 미역국과 밥을 차반에 담아 부엌 뒷문을 열고 살짝 나를 불렀다. 열셋 식구가 눈치채지 못하게 부엌 뒷골목에서 그 생일 밥을 먹게 한 것이다. 말이 미역국이지 밥이 끓을 때 밥알이 숭숭 넘쳐 들어 보리밥인지 미역국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집을 떠나올 때까지 그렇게 거룩한 생일상을 받았다.

    둘째 딸 출산일이 다가오는데 빈 쌀독을 보며 가슴이 아팠단다. 이웃에서 쌀 한 말을 빌려 왔지만 그 쌀이 다 떨어졌을 때에야 세상에 나온 둘째 딸. 그러니까 산모의 밥을 지을 쌀도 없이 태어난 셈이다. 어머님은 이렇게 태어난 둘째 딸이 살아가면서 밥을 굶는 신세가 되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 태산이셨다.

    “생일에 미역국을 먹어야 인덕(人德)이 있단다. 빈 쌀독을 안고 세상에 나왔지만 대신 인덕(人德)이라도 마음껏 받아라.”

    어릴 땐 인덕(人德)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인생이 내 노력으로 사는 줄만 알았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하니 어머님의 그 뚝배기 미역국 덕분에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것 같다. 가족, 이웃, 교육동료들,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 내가 여기 있음은 그분들의 덕분임을 이제사 깨닫게 되니 나도 참 우둔한 사람이다. 돌아보니 모두가 어머님께서 축복해 주신 인덕(人德) 때문인데.

    원순련(미래융합평생교육연구소 대표·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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