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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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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뿌리 깊은 나무- 한성태(한국전기연구원 전기물리연구센터)

  • 기사입력 : 2020-08-30 20: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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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 여름, 대한민국 산업기술 관련 대형 정책이 장맛비처럼 쏟아졌다. 7월 초의 ‘뿌리 4.0 경쟁력 강화 마스터플랜’에서 시작하여 ‘한국형 뉴딜’을 거쳐 이달 초에 발표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2.0’까지. 일본 수출규제 대응을 넘어 ‘뿌리산업’ 첨단화와 ‘소부장 ’ 품질 확보를 통해 대한민국 산업기술의 틀을 다시 짜기 위한 ‘공세적 전환 전략’으로 이해된다. 지난달 중순에 있었던 대통령 국회 연설에서는, ‘한국형 뉴딜’의 하나로 기존 산업기술에 디지털 역량을 결합하여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거듭나기 위한 ‘대한민국 대전환’ 선언도 있었다.

    거듭남은 체질 개선을 전제로 한다. 기존의 대한민국 연구개발 전략은 공개된 기술을 열심히 부지런히 따라하기였다. 추격형 연구에서는 남들이 씨 뿌리고 키워놓은 모델을 가져다 ‘더 큰 노력’과 정성으로 심고 돌보는 것만이 우리의 몫이었다. 대통령이 천명한 선도형 경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뿌리 내릴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리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정동 교수의 주장처럼 일시적 총력 동원이 아니라 장기적 경험 축적 사회로 전환해야 ‘게임 체인저’로 발돋움할 수 있다.

    산업혁명을 통해 최초의 게임 체인저가 되었던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요인은 매우 복합적이어서 하나로 특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필자의 관점에서 해양시계 개발 사례가 많은 것을 웅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과 같은 GPS가 없던 시절,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술 현안은 항해하는 선박의 정확한 위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위치 정보가 확실해야 제대로 된 지도를 만들 수 있고, 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가로축인 위도는 수평선 위 북극성의 높이로부터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세로축인 경도는 그렇지 못했다. 왕실은 런던 근교 언덕 위 그리니치라는 곳에 관측소를 세워 경도의 기준인 자오선을 설정하였다. 지구는 24시간 동안 360도 자전하므로 같은 위도상의 두 지점 사이에서 1시간의 차이가 난다면 경도로 15도에 해당하는 셈이므로, 출항하는 배들은 그리니치에서 시계를 맞췄다. 하지만 문제는 정밀한 시계. 진자를 사용하던 당시의 시계는 정확도가 낮았다. 출렁이는 선박 위에서는 더욱 그랬다.

    영국 의회는 ‘경도법’을 제정하여 국가적 필요에 호응하였다. 최대 0.5도(적도 기준 약 60㎞)의 오차를 허용하는 경도 측정방법 개발자에게 거액의 상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존 해리슨이라는 21세의 젊은 시계 기술자는 이 법에 자극받아 본격적으로 해양시계 제작에 뛰어들게 된다. 전통적인 시계추 대신 정밀한 태엽을 이용해 배가 흔들려도 진동속도가 달라지지 않는 혁신적 구조를 설계했다. 부품의 수를 줄이고, 소재를 개선하여 마찰을 최소화하는 등 끊임없는 개량을 추구해 나갔다. 68세 때인 1759년, 마침내 손바닥 크기에 불과한 항해용 태엽 시계(크로노미터) 개발을 완성하게 된다. 그가 만든 크로노미터는 오늘날 손목시계의 원조였고, 그 시계 덕분에 정확해진 해상지도를 바탕으로 안전한 바닷길을 확보한 영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됐다.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여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학기술 의제를 선제적으로 설정한 왕실, 긴 호흡으로 과감한 인센티브 조례를 제정하여 혁신을 끌어낸 의회, 그리고 40여년에 걸친 집념으로 숱한 시행착오를 이겨낸 연구자. 이 삼박자의 조합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산업기술계의 한 축인 정부 출연연구원의 핵심 주제 지속기간은 평균 7.6년이라고 한다. 개인적 성취를 위해서도 1만 시간(10년가량)의 숙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뿌리 내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이곳 기관장의 임기는 3년으로, 장기적 정책 비전을 제시하고 경험 축적 과정을 인내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미증유의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고 전국이 야단법석이다. 대한민국 과학기술계는 어떻게 뿌리를 다져가고 있는지 한 번쯤 되돌아볼 때다.

    한성태(한국전기연구원 전기물리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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