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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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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톨레랑스- 한성태(한국전기연구원 전기물리연구센터장)

  • 기사입력 : 2020-07-12 21: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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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의 대학원 시절 이야기이다. 지금은 외주화로 사라졌겠지만, 당시 학교 건물 지하에는 학생들의 연구를 신속하게 지원하기 위한 기계공작실이 있었다. 기름 냄새 밴 공작실 한편에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실험에 필요한 기구를 깎는 것을 도와주거나 조금 복잡하고 정교한 물건은 직접 가공해 주곤 하셨다.

    당시 필자는 고에너지 전자 빔이 샤프심 두께의 작은 구멍을 통과하면서 5G 통신급 주파수의 전자파와 상호작용하는 장치를 개발하고 있었다. 이론적 예측과 한 치의 오차도 없기를 바랐기에 맞물려 조립되어야 하는 가공품의 정밀도를 매우 엄격하게 요구했다. 전산해석에 이용했던 설계도를 가다듬어 가공 도면을 멋지게 작성하고 할아버지께 전해드렸다. 물끄러미 도면을 바라보시던 할아버지는, 풋내기 연구자에게 현장 작업자와 명확하게 소통하기 위한 규칙, 즉 설계도면 상에 기입하는 호칭치수에 관한 기본 규칙을 알려주시며 중요한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호칭 치수와 실제 제작된 치수는 절대 같을 수 없다.”

    정확한 호칭 치수로 작업자와 명확하게 의사소통했더라도, 제품의 성능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허용 가능한 최대치수와 최소치수를 정해 제작 결과를 평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특히 가공품들을 서로 맞물리게 조립해야 하는 경우에는 경험을 기반으로 상황에 맞게 일정 정도의 여유를 줘야 하는데, 이런 것을 공차라고 한다. 공차의 영어 표현은 ‘tolerance’이다. 전문용어로 허용오차나 공차로 해석되지만, 일상용어는 내성, 저항력, 용인, 관용, 아량 등으로 번역된다. 후자의 프랑스어 표현이 톨레랑스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중 하나라고 하는데, 홍세화 작가가 프랑스 사회 저변에 뿌리내리고 있는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 차이와 다름에 대한 존중을 소개하면서 유명해지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혁명의 과격함을 경험하고 난 뒤, 서로 다른 의견을 용인하고 공존하며, 자신과 다른 의견이라도 탄압받지 않도록 연대하는 자세가 문화적 가치로 사회 저변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리라고 과감하게 추측해본다.

    혁명 이전에도 프랑스는 종교적 견해 차이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16세기 초 ‘위그노’로 불리는 칼뱅주의 신교도들이 가톨릭 왕정의 박해 때문에 유럽 전역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김태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당시의 최고 기술자들이었다고 한다. 박해를 피해 유럽 곳곳에 퍼진 위그노들 덕분에 독일이 프랑스를 추월하여 기술대국 반열에 올랐고 스위스는 근대 공업의 기반을 다졌다고 한다. 특히 영국은 위그노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특별 이민법을 제정해, 18세기 산업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기본을 다졌다고 한다.

    생명이 잉태되는 임신 과정에도 톨레랑스가 관여한다.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피터 메더워는 이 과정을 ‘임신 역설’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이물질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항상 타자를 감시하고 공격하는 면역세포의 존재를 고려할 때, 임신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태아 유전자의 절반은 유전적으로 완벽한 타인에게서 온 것이기에 모체의 면역체계는 태아를 거부해야 정상인데, 모체는 태아를 거부하기는커녕 소중하게 품고 키워 낸다는 것.

    결국 톨레랑스는 혁신과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리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게 인드라 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비추고 있는 밀접한 관계라면, 내 것만큼 타인의 것도 인정하고 다름을 존중하는 톨레랑스가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장마로 습도까지 높아 불쾌지수도 올라갈 것이다. 얼마 전에 읽은 프랑스 수필가 도미니크 로로의 글 한 구절로 마무리한다. “틈이 있어야만 햇살이 파고들 수 있다.”

    한성태(한국전기연구원 전기물리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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