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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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말(이 말이 내게로 스며들었다, 살아갈 힘을 얻었다)

내 삶에 힘 불어넣는 그녀의 보약 같은 말

  • 기사입력 : 2020-07-08 08: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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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복은 아비가 이러하더라도, 형이 저러하더라도, 묵묵히 숫돌 같은 세월을 보내며 자기 삶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런 한복이가 내놓은 ‘나는 여기 살 기다’라는 저 말은, 그래서 자기 삶의 확신이자 자기 존엄의 증명에 다름 아닙니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여기 산다고 말하는 인간, 그리고 어디든 찾아가서 여기 인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흑인 음악가. 그들이 보여주는 존엄한 인간의 모습에 지금의 옹색한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그리고 나는 어떤 나이고 싶은가. 한복의 말, ‘나는 여기 살 기다’라는 저 말을 나는 어디에서 외칠 수 있을까요.”(본문 54쪽)


    2018년 대하소설 〈토지〉 읽기의 진수를 선보여 독자들 사이에서 은근한 입소문이 퍼진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의 저자 김연숙씨의 새로운 인문 에세이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출범 직후인 2012년부터 현재까지 고전 읽기 강의를 통해 학부 학생들과 함께 〈토지〉를 읽어온 저자는, 개인적으로는 스물다섯 살 때 처음 박경리와 〈토지〉를 만났다. 그 후 수십 년간 수많은 제자, 이웃, 친구와 이 책을 읽었고, 강의도 했다.

    저자는 고전, 특히 문학이 우리 삶을 가치 있게 이끌어갈 힘을 지녔다고 믿는다. 많은 순간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고 적잖은 위기를 만나 흔들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토지〉 속에 등장하는 600여명 다채로운 인간 군상으로부터 때로는 희망을,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그 힘을 얻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지〉를 처음 만난 그날 이후 〈토지〉와 ‘박경리의 말’을 노트와 마음에 아로새겼다고 한다. 〈토지〉와 박경리의 말에서 발견한 인문학적 사유를 삶에 적용하고, 나아가 우리 앞에 놓인 현실에 구체적으로 활용해봄으로써 더 단단하게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소설 〈토지〉는 한말에서 해방까지 60여년 역사를 배경으로 민중의 고된 삶을 생생히 재현하는 고전이다. 50여 년 전인 1969년 쓰기 시작한 옛 시절 이야기를 왜 2020년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같이 읽겠다며 달려드는 것일까. 박경리 스스로 밝힌 바 있듯 〈토지〉는 연민으로 가득한 책이다. 힘겨운 세상살이를 이어가는 보통의 인생들에 대한 박경리의 깊은 연민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토지〉에는 그저 선한 사람도 그저 악한 사람도 없다.

    유시민 작가도 한 TV 프로그램에서 “토지는 박경리 선생 자신이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를 잘 보여준, 우리 인간을 제대로 파악한 작품이다. 내가 본 역사소설 중에서 우리 인간을 제대로 파악한 철학적으로 훌륭한 소설”이라며 “우리말로 쓴 우리 소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어떤 소설보다 먼저 읽어봐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저자는 “〈토지〉의 말을, 그리고 박경리 선생의 말을 모으고 싶었습니다. 선생의 책을 읽는 동안 제게로 스며든 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밑줄 그은 문장을 옮겨 적었습니다.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을 다시 꺼내놓으니, 뛰어난 문장이나 아름다운 표현과는 뭔가 달랐습니다.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겨우 견디며 내뱉는 말, 실 한 오라기 같은 기쁨을 잡으려는 말, 칠흑 같은 어둠을 버티려 안간힘 쓰는 말, 그래서 애달프고 간절한, 그런 말들이었습니다. 대단치 않은 사람들의 예사로운 말도 많았습니다. 이들에게 끌리는 나의 마음이 무엇인가 싶었습니다”라고 술회했다.

    이 책은 단순히 그럴듯한 말, 선하고 좋은 말, 교훈적인 말을 가려 뽑아둔 그런 책이 아니다. 〈토지〉를 적어도 30년 이상 매번 다르게 혹은 다른 각도로 읽어온 한 연구자에게 와 닿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손이 그 책을 붙잡게 만드는 힘의 바탕이 된 말과 이야기를 올올이 엮은 책이다.

    작가 은유는 추천 글에서 “인문학자 김연숙은 박경리 선생이 생으로 벼리고 몸으로 가꿔온 언어의 숲에서 귀한 문장들을 추려 이야기를 풀어간다.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안 하는 것은 쉽고 하는 것이 어려워’ 같은 말은 수시로 설움이 왈칵 솟는 약한 몸에 힘을 길러주는 보약 같고, ‘왜라는 질문이 없으면 문학도 종결되는 것’이라는 말은 쓰는 이유를 일깨우는 종소리 같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마지막 글에서 이 책을 출판한 이유를 내비쳤다. “제가 끌려 들어간 곳이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딱히 뛰어난 것도 없다며, 스스로 어정쩡하다 여겨왔던 제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왜 쓰냐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왜 사냐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 질문을 계속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 글쓰기였습니다. 그로 인해 나 자신과 이웃을, 나를 둘러싼 세계를 조금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었습니다. 이상현 아니, 박경리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내부, 자신을 둘러싼 외부와의 대결’을 멈추지 않는 것이 ‘글 쓰는 나’였던 겁니다.”(본문 282쪽)

    김연숙 저, 천년의상상, 288쪽, 1만5,300원.

    정오복 기자 obokj@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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