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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4차 산업혁명 - 한성태 (한국전기연구원 전기물리연구센터장)

  • 기사입력 : 2020-05-24 21: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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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6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무선전력전송학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을 처음 방문하는 터라 소풍 떠나는 아이처럼 설렜다. 어릴 적부터 존경해오던 위대한 과학기술자들이 안장된 웨스트민스터사원을 방문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웨스트민스터사원의 공식명칭은 Royal Westminster Abbey이다. 영국에서 Royal(왕립) 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한국이나 미국에서 국립(National)보다 더 크고 격이 높은 것을 상징하는 듯 했다. 11세기 중반 참회왕 에드워드가 건설을 시작한 이래로 대관식 등 왕실 주요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1987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다. 기본적으로 역대 왕과 왕족의 무덤이지만 이들 말고도 국가에 기여한 군인과 정치가, 영국을 빛낸 작가, 배우, 화가 등 문화예술가와 과학기술자들도 함께 안장되어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영면하고 있는 과학기술계의 대표 인물로 진화론을 제창한 찰스 다윈,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그리고 최근 타계한 스티븐 호킹을 꼽을 수 있다. 특히 필자의 연구 분야와 관련하여, 사제지간이면서 원자 물리학을 개척한 공로로 함께 안장된 조지프 톰슨과 어니스트 러드퍼드, 그리고 전자기학과 열역학을 개척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고 안장된 윌리엄 톰슨(캘빈 경)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성지순례 같은 방문이었다.

    학회 참석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우리나라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같은 곳이 없을까 생각해보았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립 사원으로 기능한 종묘와 성균관 문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역대 왕들의 위패는 종묘에, 나라에서 숭상하는 인물들의 위패는 성균관에 배향되어 있다.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였던 만큼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 및 후학 20명의 위패가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모두 중국인이다. 그나마 광복 후 94명의 위패는 묻은 결과라고 한다.) 21명의 중국인 좌우로, 신라시대 설총과 최치원, 고려 말 안향과 정몽주, 그리고 조선시대 정치인 겸 학자 열네 분이 동국18현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중에서 병자호란 이후 북벌론과 예송논쟁을 주도했던 송시열이라는 분이 눈에 띈다. 톰슨과 러더퍼드처럼 스승인 김장생과 함께 왕립 사원인 종묘에 배향된, 성리학자 겸 정치가이다. 유교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친구조차 주자학의 정통성을 부정한 사문난적이라 지목하고 배척할 정도로 성리학 근본주의자였다.

    문묘 종사의 영예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동법을 시행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직후의 재난을 구호하는 등 실제 정책에서 업적을 남긴 동시대의 김육이라는 분과 크게 대비된다. 김육은 한국 최초의 태양력인 시헌력을 도입하고 보급하여 날짜에 따른 기후 예상을 용이하게 하였고, 엽전을 주조하기 위해 구리와 철의 합금에 관한 연구도 수행했다고 한다. 훗날 이 기술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이 왜란 후 소실된 조선의 금속활자를 복원하였다고도 한다.

    실제 정책에서 업적을 남긴 명신보다 이념투쟁에 철저했던 근본주의자를 높게 평가하는 이런 문화의 바탕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지난 4·15총선에서 거대 양당(위성정당 포함)은 대한민국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연구기관의 전임 기관장 두 사람을 비례대표 명단에 각각 포함시켰는데, 여야 구분할 것 없이 애초에 당선을 염두에 둔 순번 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센 파도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영국에서 나고 자란 데미스 허사비스 같은 다문화 인재가 구글 딥마인드를 창업하고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 연구를 주도할 수 있었던 문화의 뒷배로 문화예술가와 과학기술자를 권력자 수준으로 예우하는 웨스트민스터 정신을 꼽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성태 (한국전기연구원 전기물리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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