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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당신의 남새밭- 이진숙(소설가)

  • 기사입력 : 2020-02-27 20: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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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니가 쓰러졌다. 여든 노구에 만성당뇨를 앓아온 터라 어느 정도는 예측했던 일이었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거쳐 뇌경색 진단을 받은 어머니는 재활병원으로 옮겨져 두 달째 치료 중이다. 다시금 두 다리로 걷게 되어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비친다. 하지만 마음뿐이다.

    지난주 병원을 찾았을 때, 어머니는 아직은 어눌한 말투로 오래 비워둔 집과 남새밭을 걱정했다.

    ‘지금쯤 시금치랑 겨울초가 뜯어먹기 좋게 났을 끼다. 그냥 두면 이내 꽃대가 올라와 못 먹게 된다.’ 어머니 눈빛에 등 떠밀려 고향집으로 향했다.

    텅 빈 집에 들어서자 남의 집인 듯 낯설고도 서늘했다.

    어머니 말대로 집 담장과 맞닿은 자그마한 남새밭에 시금치와 겨울초, 쪽파며 대파, 봄동이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작년 늦가을에 뿌려놓은 것들이 겨울을 견디고 싹을 틔우고 파릇하게 자랐다. 자주 솎아주지 않아 빽빽하게 돋은 그것들을 캐서 마른 잎을 떼어내니 잠깐 새 한 광주리나 되었다.

    두 달째 병실에만 갇혀 있는 어머니는 그런 와중에도 당신의 남새밭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새밭에 봄기운이 가득했다. 텃밭 가장자리에 보랏빛 봄까치풀꽃이 입을 벌리고, 밭고랑 군데군데 유채가 샛노랗게 꽃대를 내밀었다. 물기 촉촉한 흙더미를 뚫고 뭔가가 꿈틀거리며 솟아오를 것만 같다.

    어느덧 고향집과 남새밭에 봄이 찾아왔지만 어머니, 당신은 여전히 매서운 한겨울 속에 갇혀 있다. 힘든 시절 견뎌온 당신의 기억이 검불처럼 수북하건만 몇 올 남지 않은 삶마저 저리 고단하기만 하니 가슴이 아프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밥상을 마주하고 밥을 먹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지독스레 가난한 집에 시집온 어머닌 평생 남의 일을 하러 다녔다.

    어느 날인가, 일찍 눈이 떠져 부엌에 나갔는데 어머니가 선 채로 맨밥을 넘기고 있었다. 찬물 한 사발 들이켠 어머니는 김치와 밥 한 덩이 담은 도시락을 들고 바삐 일터로 내달렸다. 그렇게 아득바득 벌어서 자식 넷을 키워내고 텃밭 딸린 집도 마련했다. 이제야 좀 먹고살만하건만 몸은 늙고 훈장처럼 골병만 주렁주렁하다.

    늙은 어머니가 짐짝처럼 느껴진 적 있다. 병이 더 깊어져 운신을 못하면 으레 요양원에 가는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곤 했다.

    오늘 문득 당신을 기다리는 빈집과 온기 밴 남새밭을 보다가 그런 마음을 품었던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무심한 자식들보다 당신의 남새밭에서 더 많이 위로받았을지 모른다.

    사철 돋아나는 푸성귀를 뜯어 장에 내다 팔고 이웃과 자식들에게 내주며 또 얼마나 흐뭇했을까.

    당신의 남새밭을 가만가만 둘러본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울타리와 밭둑에 쌓은 돌멩이 하나하나에서 당신의 숨결이 얼비친다. 옹기종기 앉은 푸성귀들이 어머니를 기다리는 듯하다.

    모두의 바람처럼 어머니가 다시금 단단해져서 빈집과 남새밭에 봄볕으로 내려앉기를 기도해본다.

    이진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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